Wright
Brothers
아마 ‘라이트 형제’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 라이트가 Wright 임을 확인 하십시오 )
세계 최초로 동력 비행기로 하늘을 날은 사람이며 이들이 없었더라면 비행기의 모습이 지금과는 매우 달랐을 것입니다.
아무튼
이번 주말에 ‘Outer Bank’ 라는 곳을 다녀왔는 데 그 곳이 바로 라이트 형제가 처음으로 동력 비행기를 날린 곳이라고 합니다.
--> 우측에12 번으로 쓰여 있는 섬. 상단에 Kill Devel Hill 이라고 있는 곳에서 라이트 형제가 처음으로 비행기를 띄웠습니다.
매우 아름다운 곳으로 노스캐롤라이나의 가장 인기있는 관광지 중 하나 입니다.바람이 세고 해변이 좋아서 서핑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좀더 정확히 말씀드리면 Outer Bank의 ‘Kill Devel Hills’ 라는 곳에서 비행기를 처음 날렸습니다.
이번 주말에는 이 곳 Outer Bank 로 여행을 떠났습니다.
저희 집 있는 곳에서 약 4시간 걸리는 데 가는 도중 이렇게 이쁜 쌍무지개가 떴습니다.
--> 미국은 땅덩어리가 커서 그런지 날씨가 변화무쌍합니다. ( 산이 없어서 바람이 잘 불어서 그런 것 일수도 )
이렇게 이쁜 쌍무지개는 처음이었습니다.
참고로 ‘노스 캐롤라이나’ 자동차 번호판을 보면 ‘First in Flight’ 라는 배경으로 번호가 쓰여있는 번호판이 많은 데 이 모두가 ‘라이트 형제’ 때문입니다.
--> 자동차 번호판. 몇 가지 디자인 중에 고르는 것인데 노스캐롤라이나에는 이게 젤 많습니다.
일단 라이트 형제로 알려진 두 형제를 보면
(좌)윌버
라이트(Wilbur Wright, 1867년 4월 16일 ~ 1912년 5월 30일)
(우)오빌 라이트(Orville Wright, 1871년 8월 19일 ~ 1948년 1월 30일)
입니다.
동생이 더 오래 살았는 데 이들 말고도 실은 로런스 필립 라이트(1861~1920), 토머스 라이트(1865~1938), 누이동생인 막내 캐서린 라이트(1874~1929)가 또 있으며 이 세 사람도 이들을 도왔음에도 실질적인 비행기 제조에 나선 이 두 사람만 알려졌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라이트 형제 전기를 읽었을 때 이분들의 직업이 참 이상했는 데 자동차도 아니고 자전거 수리공이었습니다.
그들의 전기에서는 몽골피 형제의 기구와 릴리엔탈의 글라이더에 감명을 받아서 연구했다고 나와있었습니다. 사실 당시에는 자전거도 엄청난 고가였으므로 지금 과 같이 생각하면 안 될 것입니다. ( 자전거 도둑이라는 영화도 있었지요 )
오토 릴리엔탈은 결국 글라이더를 타다가 돌풍에 의해 글라이더가 추락해서 죽게되고 그 후 이 형제들은 동력을 가진 날 것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그 당시는 우마차가 주로 다니던 시절이었으며 비행기는커녕 제대로 된 자동차도 없었을 시절이었습니다. 그런데 무슨 비행기가 나왔을 까 정말로 신기하였습니다.
그리이스 신화의 이카로스의 예를 들지 않더라도 인간의 날고 싶은 욕망은 기원을 알기 어려울 정도로 오래되었습니다. 그러나 중력이라는 벽 앞에서 번번히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19세기에 들어서서 과학 기술이 발달하면서 ‘날고 싶은 인간의 욕구’ 는 점점 구체성을 띄게 됩니다
동력비행기 개발을 위한 노력
이들은 독자적인 연구만으로는 도저히 어렵다고 판단하여 미국 스미소니언 과학협회 – 지금도 있습니다 - 를 찾아가 전문적인 과학자들에게 여러 정보를 듣기도 하며 열심히 노력합니다.
여러 연구와 같이 바람의 크기 및 일정 속도의 바람이 부는 곳을 찾아 헤맨 끝에 노스 캐롤라이나 주에 있던 인구 100명도 안되는 작은 마을 키티호크 (Kitty Hawk)로 찾아갑니다. 원래 라이트 형제가 살고 있는 곳은 Ohio 의 Dayton 이었는 데 그 곳은 이미 빌딩도 많고 암튼 그 당시는 추락을 가장 염려했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이곳을 선택하였습니다.
지금의 그 곳은 노스캐롤라이나의 가장 큰 관광지 중 하나지만 그 당시는 인구 100명도 안 되는 시골이었습니다.
Kitty Hawk 가 있는 Out Banks 는 해변 옆의 긴 섬으로 풍화 작용에 의해 생긴 섬 입니다. 바람이 세서 모래가 들락달락.
역시 바람이 세서 큰 나무가 별로 없으며 진흙과 모래로 덮여 있어서 추락을 해도 덜 다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 이유로 바람이 세기 때문에 비행하기는 너무나 좋은 조건이 됩니다.
결국 형제들은 이곳을 연구거점으로 삼아 3년에 걸친 온갖 시행착오 끝에 1903년 12월 17일 프랑스계 글라이더 조종사이자 비행기 연구가인 옥타브 샤뉘트(Octave Chanute, 1832~1910)를 포함한 5명이 보는 자리에서 최초 동력 비행기 플라이어 1호를 타고 약 12초 동안에 짧은 비행에 성공했습니다. 바람이 아닌 스스로의 힘으로 난 인류 최초의 비행 성공기록이었습니다. 그 후 4 번의 비행을 더 성공하게 됩니다
--> 원래는 12월 14일에 하려고 했는 데 실수를 하여 기계에 결함이 생겼다고 합니다. 그래서 최초의 비행은 1903년 12월 17일에 4차례에 걸쳐 이루어졌습니다. 마지막 비행은 거의 260 미터 정도 날라갔습니다.
--> 이를 기념하여 첫 번 째 비행을 한 장소에 기념으로 모형을 만들었습니다
--> 가장 높은 곳에 기념탑이 있습니다
알려지지 않은 수난
보통 위인전에 잘 다루지 않은 게 이들의 고생담입니다. 동력 비행에 성공했다는 소식에 미국 과학계는 축하보다는 분노와 시샘을 보였습니다. 어처구니없게도 그 중 하나가 바로 라이트 형제가 찾아간 스미소니언 과학협회 간부인 새뮤얼 랭글리(Samuel Langley, 1834~1906) 박사였습니다.
글라이더 비행에 성공한 랭글리는 이미 1897년부터 동력 비행기 개발에 힘을 기울여왔는데 듣보잡인 아마추어 형제들이 자신을 제쳐두고 비행에 성공했다는 소식에 분노했고 하필이면 1899년 라이트 형제는 그를 찾아와서 동력 비행기에 대한 정보를 들었기에 랭글리 박사는 자신의 영광을 듣보잡 두 놈이 훔쳐갔다고 이를 갈았다고 합니다. 게다가 1903년 12월 8일 겨우 아흐레 전, 랭글리 박사는 동력 비행기 시험비행에 나섰다가 추락했기에 자신이 실패하고 라이트 형제가 성공했다는 걸 믿지 못했습니다.
그리하여 라이트 형제의 첫 번째 비행이 이루진 7개월이 지난 1904년 7월. 랭글리 대 라이트 형제의 대결이 벌어집니다. 둘이 동력비행기를 타고 2만명이 넘는 사람들 앞에서 누가 잘 날아가나 시범을 보였던 것이죠. 그리고 결과는 라이트 형제 완승.
랭글리의 비행기는 힘없이 강물에 추락했지만, 라이트 형제가 탄 비행기는 잘만 날아갔고. 그것도 15분씩이나 400미터 위를 쌩쌩 날아갔기에 미국 언론은 이번이야말로 "라이트 형제 하늘을 날다!"라고 확인 보도를 해버렸습니다. 결국 랭글리는 패배에 충격을 먹고 좌절하여 모든 활동을 멈추고 폐인처럼 지내다가 오래가지 못해 죽게 됩니다.
하지만 랭글리의 제자들이 주축이 된 스미소니언 과학협회는 라이트 형제가 스승의 아이디어 및 여러가지를 도용한 것이라고 주장하여 라이트 형제는 1년이 넘는 온갖 조사와 수사를 받아야 했습니다. 물론 결과는 무죄. 어떤 증거도 없었으며 무엇보다 똑같다면 왜 랭글리 비행기는 추락하고 저들이 만든 비행기는 잘 나는데? 라는 결과가 이를 입증했던 것.
이렇게 무죄가 입증되고 이들은 계속하여 여러 단점을 고쳐나가면서 개량된 비행기를 만들게 됩니다. 1905년에 이들이 만들어낸 '플라이어 Ⅲ'은 선회·방향전환·원운동·8자비행이 가능했고, 30분 이상 날 수 있었습니다.( 정말 장족의 발전 )
그러나, 이럼에도 스미소니언 협회는 라이트 형제가 도용했다는 언플을 계속했고 이런 여파 때문인지 이들이 만든 비행기는 일절 팔리지 않았습니다. 하다못해 이들은 미군 측에 시험비행도 여러번 했지만 미군 측은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되려 유럽이나 아르헨티나(당시에는 세계적인 경제부국이었다.), 심지어 일본에서까지 관심을 보이며 생산공장을 자국 안에 만들자고 온갖 조건을 제시하며 유혹했습니다.
그런 가운데, 라이트 형제를 꾸준히 지지하던 옥타브 샤뉘트가 조국이었던 프랑스에 열심히 이들을 알렸고 동력 비행기에 대한 걸 홍보한 끝에 결국 1908년 프랑스가 세계 최초로 동력 비행기 공장을 만들게 되었고 미군 측은 제시하는 시험비행을 성공시키면 구입하겠다는 조건을 제시하여 시험비행을 성공시켰지만 그럼에도 여러 조건이 안 맞는다면서 거부했습니다.
그래서 프랑스에서 생산에 주력하지만 결국 공짜는 없다는 듯이 제조기술이 유출되어버립니다. 이 일로 프랑스는 독자적인 비행기 제작에 들어가고 더더욱 새로운 기술 등에 여러 모로 노력하면서 라이트 형제와의 관계는 끊어지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이때 앞서 말한 두몽과의 최초 발명 여부가 논쟁거리가 되었으며, 10여년 간 스승이자 친구였던 옥타브 샤뉘트가 기술 유출에 연루된 게 드러나서 라이트 형제와 샤뉘트는 엄청 다툰 후 결국 갈라서게 됩니다
이런 와중에 미국에선 글렌 커티스(Glenn Curtiss, 1877~1930)라는 이가 라이트 형제의 비행기와 비슷한 걸로 특허를 내고 공장을 차렸고 되려 라이트 형제가 자신의 기술을 도용했다고 소송드립을 치며 라이트 형제를 괴롭혔습니다. 어처구니없게도 조국인 미국은 커티스의 주장에 동조하여 원조인 라이트 형제는 온갖 고생을 해야했으며, 기나긴 소송이 시작됩니다.
소송을 맡았던 것은 형인 윌버였는데 잦은 여행과 재판으로 인해 건강이 쇠약해진 상태였습니다. 1912년 보스턴으로 사업차 여행을 다녀온 후에, 티푸스 열 진단을 받았고, 몇 주 동안 의식을 잃었다 회복했다를 반복하다가 끝내 45세 한창 나이로 윌버는 사망합니다.
( 이런 것은 사실 전기에 나오지 않습니다. 연구 해야 될 사람을 이렇게 괴롭히다니 )
1914년에 미국 상급 법원에서는 라이트 형제의 손을 들어주었지만, 이번에는 세간에서 라이트 형제가 탐욕을 부린다는 식으로 비난을 퍼부게 됩니다.
미국을 떠나서
조국에서의 푸대접과 윌버 형의 죽음으로 슬픔과 절망에 빠진 오빌은 다른 형인 로런스와 같이 미국을 떠납니다. 슬픔을 떨치고자 그는 비행기 생산에 전력을 다했고 더 나은 발전을 위하여 연구했으며 프랑스 및 독일, 영국, 네덜란드와 멀리 아르헨티나를 오고가면서 비행기 홍보를 했습니다.
오빌은 1918년도에 1911년 모델B형을 마지막으로 조종하고는 비행기를 조종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는 여러 항공 위원회에서 우대받으며 위원으로 활동을 했었는데, 그 중에는 NASA의 전신인 NACA도 있었으며, 28년간 몸을 담았습니다.
(아무튼 원시적인 비행기를 만든지 70년도 안 되서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달에도 갔으니 정말 대단한 발전이라고 아니 할 수 없습니다.
참고로 말씀드리면
1903년 라이트 형제 ' Flyer' - 첫 비행 12초 36 m
1927년 찰스 린드버그 ' Spirit of St. Louis' - 처음으로 논스톱 대서양 횡단. 혼자서 성공
1947년 Captain Chuck Yeager 'Bell X-1' 처음으로 마하 돌파 Mach 1.07
1969년 아폴로 11호 달에 착률
1981년 컬럼비아호 우주 탐험. 첫 비행에서 1,733,000 km 비행. 참고로 그전 까지는 로켓을 한 번 쓰고 버리는 것이었슴)
1928년 오랫만에 미국으로 돌아온 오빌은 자신들을 괴롭혔던 커티스가 사업실패로 부도에 빠지자 그의 생산공장을 돈으로 사면서 복수에 성공했다. 그래서 이름이 커티스-라이트 (마음같아서는 라이트-커티스로 고치고 싶겠지만 그동안 커티스 사로 워낙 알려졌기에 이게 더 낫다고 판단했다고 한다.)가 된 것입니다. 이들을 고소하고 사기꾼으로 몰던 커티스는 자신이 역관광당하고 비참하게 살다가 오래 못가 1930년 허무하게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그 후 오빌이 만든 회사는 커티스-라이트 사를 거쳐 보잉사로 연결되어 지금도 비행기를 만들고 있습니다.
비행기 공장의 성공 및 온갖 로열티를 인정받아서 경제적으로 어려움은 없었으나 오빌은 살아 생전에 미국이 외면하는 것을 잊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오빌은 1933년 키티호크에 세계 최초 동력비행 기념비를 세우고 30주년을 기념하는 자리도 주로 유럽 측 자금으로 지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1944년 록히드 항공사가 만든 두번째 비행기가 캘리포니아 주의 버뱅크(Burbank)에서 워싱턴까지의 거리를 6시간 57분으로 주파했는데 이 비행기를 조종한 사람 중 한 명이 하워드 휴즈 – 그 유명한 억만 장자 겸 파이럿, 아이언 맨의 토니 스타크의 실제 모델 – 였었다고 합니다.
돌아오는 도중 이 비행기는 라이트 비행장에 멈춰섰고, 오빌은 생애 마지막 비행을 했다고 합니다. 잠깐이나마 조종간도 잡았는데, '비행기의 날개 길이가 내가 처음 날았던 때보다 길어졌군.'이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1948년 1월 30일, 태어난 고향인 오하이오 주 데이턴 시에서 오빌도 눈을 감았습니다. 향년 77세. 첫 비행을 한지 만으로 44년 만이었다고 합니다. 며칠전부터 혼수상태이던 그의 유언은
"바람은 높아......이제 날 수 있겠어."
마치 옛날 40여년 전을 회상하듯, 그 비행기를 띄울때 모든 걸 잊고 비행기 연구에 전념하고 드디어 하늘을 날때 벅차던 그 시절을 되새기며 눈을 감은 모양입니다.
말과 마차가 다니던 시대에 태어나 항공 시대를 열었던 오빌은 초음속 시대의 태동기를 직접 목격한 산 증인이었습니다.
물론 그 사이가 인류의 경제 발전이 가장 빨랐고 또 2번의 큰 전쟁이 있어서 과학 발전 또한 다시 못 올 그런 정도 속도로 발전한 이유도 있겠지만 처음 12초간 37 미터 정도를 비행을 시작으로 살아 생전에 음속의 비행기까지 겪었으니 정말 격세지감을 느끼게 하는 삶이었음은 분명해 보임니다.
그리고 그가 죽은 뒤 20년이 조금 넘어서 인간은 달 까지 가게 됩니다. 인류 역사상 컴퓨터를 제외하고 이렇게 발전 했던 것이 무엇이 또 있을까 싶습니다.
물론 그가 만든 비행기 덕분에 1차 대전과 2차 대전을 포함하여 그 후 많은 전쟁에서 비행기는 살상용으로 사용되게 됩니다. 과학의 발전이 꼭 좋은 것 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긴 하네요
윌버와 오빌 모두 결혼을 하지 않아 자식은 없었다고 합니다. 연구하느라 연애는 못 한 모양입니다.
* 글의 많은 부분을 윈하키밀러를 참조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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