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이야기

우리나라를 빛낸 스포츠 스타

다린이아빠 2009. 12. 16. 17:01

본인은 운동을 잘 하지만 해도 해도 늘지 않는 다는 사람들을 위해 자존감을 세워주기 위해 우리가 모르고 있는 사실을 오늘 알려 드릴려고 합니다.

 

물론 김연아, 신지애등 올해 우리나라를 빛낸 스포츠 스타들이 많지만 실제로는 더 많은 사람들이 우리 한민족 배달 민족이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오늘 우리가 대부분 몰지각한 사람들이 외국 사람인 줄 알지만 실제로는 우리 민족이 사람들에 대해서 소개 할 까 합니다.

 

기대 만빵 하셔도 좋습니다.

 

 

吳草娥 -

1904 년 하와이로 강제 징용을 당했던 오대수 씨가 5 대조 할아버지인 오초아씨는 실제 얼굴을 보아도 한국인임을 한 눈에 알 수 있을 정도다. 오대수씨는 조정래 선생의 아리랑에 나왔던 방영근의 실제 모델인 김낙영씨와 함께 1904년 돈 20원에 일제에 의해 하와이로 이주 하와이에서 노동을 하다가 돈을 모아 샌프란시스코 경유 결국 멕시코로 이주하여 파인애플 농장에서 막노동을 한 멕시코 이민 1세가 된다.

여담이지만 김제 출신의 신지애의 5대조 할아버지도 김낙영씨와 잘 아는 사이였다고 하고 결국 둘은 골프로 만나 친구였던 고조 할아버지 얘기도 하며사진을 정답게 찍기도 하였다.

가끔씩 한국 기자들에게 생김새와 이름 때문에 한국인으로 오해 받는 적도 많으나 초아씨는 화를 내지 않고 상냥하게 답한다는 이야기는 널리 알려진 사실이고 이는 아는 사람들은 다 알듯 이런 과거를 지닌 것 때문이다.

 

이력

 

출생

1981년 11월 15일 (멕시코)

신체

170cm

학력

애리조나대학교 학사

데뷔

2003년 LPGA 입회

수상

2009년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투어 올해의 선수상

2009년 미국여자프로골프(LPGA)투어 나비스타 LPGA 클래식 우승

2007년 - 2009년 올해의 LPGA 선수상

 

 

 

 

 

李治勞 -

 

 일본 말로 일남 (一郎) 이라는 말도 있으나 사실은 한국말을 음차한 것으로 의미가 없다. 덕수 이씨 32대 손이었던 이씨의 할아버지는 1940 년 대동아 전쟁 시 일제에 의해 징병되어 사할린에서 석탄 채광을 하며 강제 노동을 당하였고 죽을 고비를 몇 차례 넘겼으나 해방을 맞아 귀국하려 하였으나 미 군정과 이승만 정부 그리고 일본 정부와의 알력과 갈등으로 결국 해외 동포들이 귀국 하지 못하게 되자 효고현 ( 고베시가 있슴 ) 으로 밀항하여 다시 부산항으로 입국하려 하였으나 그 때 밀항을 도와주려 했던 젊은 처자와 마음이 맞아 그곳에 결국 살게 되었다는 설이 있다. 할아버지는 첫 손자인 이씨를 귀여워하였고 너무 본인이 정치적 힘이 없는 서민이라 휘둘린다는 생각을 하고 손자의 이름을 ‘다스려 번성하게 하다’는 뜻의 ‘치로(治勞) ’ 라고 지었으나 일본 사회에서 재일 동포에 대한 차별을 견디지 못하고 그냥 같은 음차인 一郎 로 개명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할아버지의 탄광을 채굴하던 힘을 이어받아 ( 가끔씩은 획득 형질도 유전된다 ) 양손을 다 사용 할 수 있고 힘이 세다.

 

결국 효고현의 고베시를 홈구장으로 쓰는 오릭스에 후보 선수로 입단한 뒤 이치로는 94년부터 독특한 타법으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 94년 시즌 최다안타 신기록(210개)을 기록했다. 또 94년부터 2000년까지 7년 연속 퍼시픽리그 타격왕을 차지, 장훈이 보유한 통산 최다 타격왕 타이 기록을 세웠다.2000년 0.387의 타율로 7년 연속 퍼시픽리그 타격왕에 오르는 등 일본 프로야구 오릭스 블루웨이브에서 9년간 개인통산 타율 0.353에 1278안타 118홈런 529타점의 놀라운 성적을 거두었다.2001년 FA 선수로 풀리자 메이저리그로 진출, 시애틀 매리너스와 3년간 총 1408만8000달러에 입단 계약했고 현재 메이저리그에서 맹 활약 중이다.

 

 

 

 

 

 

趙悟端 -

 

조씨는 얼굴 생김에서 알 수 있듯이 완전한 한국인은 아니다. 엄마가 한국계로 알려져 있다. 조씨의 아버지는 주한 미군이었는데 한국에서 그만 잠깐의 실수로 태권도 도장을 하는 조대풍 씨의 딸과 교제를 하다가 조씨를 낳았다.- 물론 본처는 미국에 있었다 - 조씨의 아버지는 제대를 하면서 미국으로 귀국하며 곧 불러주마 라며 다른 주한 미군 같이 이야기 하였으나 역시 여느 주한 미군 처럼 역시 생깠다. 아무튼 조씨의 아내 조모 여인은 그를 낳고 ‘각성하여 바로 잡다’ 는 뜻의 조오단이라고 이름을 지었는데 이 아이는 어렸을 때부터 각성을 하려 하였으나 결국 안 되어 겉만 스님처럼 머리만 각성하는 척 하였다. 아버지의 피를 이어받아 바람기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혹자는 그의 외할아버지가 태권도 사범이어서 태권도를 잘 하라는 의미로 兆段 이라는 설도 있으나 학계에서는 정설로 받아드리지 않는다. 조 여인이 아들을 데리고 미국으로 가서 아버지를 찾은 이야기는 눈물 없이는 못 듣는다.

하여튼 한국 현대사의 슬픈 단면 중 하나다.

한국의 청소년들이 그를 그 토록 따른 이유는 바로 피붙이의 이끌림이었던 것이다

 

 

 

湖道路 -

한국에도 자주 오고 어쩐지 친숙한 우리의 효도르, 그러나 이 효도르 역시 한국인 인 걸 아시는가? 효도르가 우리나라에 자주 오는 이유는 이 역시 조오단과 같은 피붙이의 어쩔 수 없는 이끌림이었던 것이다.

호도로의  할아버지 즉 호강훈 씨는 1941년 중일 전쟁 때 함경도에 살다가 일제에 의해 강제 징집 되어  러시아군과 싸우게 된다. 전쟁 시 먹을 게 없어 아무거나 먹다가 결구 설사를  비롯한 토사 곽란을유발 정로환 (征露丸 - 러시아를 정복하기 위해 먹는 약 )을 먹으며 열심히 싸우던 그는 결국 러시아 군에 잡히고 만다.

 

러시아 군에서 당시 독일과의 참전을 위하여 서부 전선으로 기차를 타고 이동 하던 중 우크라이나 지역의 한 역에서 10 분간 정차하던 중 국수를 먹던 감시병을 따돌리고 탈출을 감행 하였다. 국수를 먹었다는 사실이 탄로 날 것을 두려워한 감시병은 호씨의 도주를 알아 차리고도 넘어갔다. ( 당시는 어수선한 시절이란 이런 일이 비일비재 하였다 자꾸 토 달지 마시라 ) 호씨는 우크라이나에서 정착하게 되고 결국 여기에 터를 잡고 결혼을 하게 된다. 호도로는 1976년에 호씨의 손자로 태어나게 되고 한국의 호랑이를 그리워 하는 마음에서 호돌이라고 하려 하다가 한자로 음차를 따서 그냥 호도로 라고 하였다. 베트남에서는 호씨의 조상이 호치민과 같고 몽고 시대( 원나라시대 )에 한국으로 넘어간 화산 이씨의 시조 이용상 장군 처럼 자기네 후손 이라고 주장하기도 하나 이 역시 학계의 정설로는 받아드려지지는 않는다. ( 전지현이 왕지현이고 화교라 중국 사람들이 자랑스러워 하는 것과 유사하다 ) 아무튼 호도로는 태어나면서부터 효심이 깊어 어머니를 뉘어 놓고 다리를 주물러 ‘효도를’ 제대로 한다 라는 소리를 들으며 ‘효도로’ 라고 불리며 특히 어머니가 앉아계시면 뉘어 놓고 다리를 주물러 ‘ 에밀뉘어놓고 효도를(에밀리아넨꼬 효도르)’ 한다고 사람들은 말을 하였다.

아! 이 효도르가 Peter 의 러시아식 발음이 아닌 호도로(湖道路) 인 한국 사람의 후손 이었던 것이다.

 

 

 

--> 자세히 관찰 하면 한국인 임을 한 눈에 알수 있다

* 사진은 모두 구글에서 퍼온 것으로 원작자가 원하시면 삭제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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