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3대 기서 중 가장 많이 읽고 우리의 생활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소설은 역시 삼국지 입니다.
원래《삼국지》(三國志)는 서진의 진수가 쓴 중국 삼국시대의 정사로 후한의 운세가 기울기 시작하던 184년부터 진나라의 사마염이 천하를 통일하는 280년까지의 기록을 담고 있습니다.총 65권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위서(魏書) 30권, 촉서(蜀書) 15권, 오서(吳書) 20권으로 구성돼 있으나 실제로 우리가 읽는 것은 나관중의 삼국지 연의 입니다.
사실 우리나라에서 삼국지는 영원한 베스트 셀러입니다. 그래서 이문열, 황석영, 장정일 심지어는 전유성 까지 삼국지를 썼습니다. 한 번 책을 쓰면 유행을 타지 않고 꾸준히 팔리니 작가에게는 좋겠죠, 마치 크리스마스 캐롤 송 음반 처럼 말이죠.
인기가 많은 이유는 아마도 서유기나 수호지와는적어도 나오는 주요 인물은 모두 실존 인물이고 아마 역사적 사실에 바탕을 두었기 때문에 독자들은 어느 정도 윤색이 있을 지라도 소설에서 벌어지는 많은 일들이 사실이라고 믿기 때문이라고 생각 된다.
그러나 삼국지의 대부분은 거짓입니다. 중요한 사건에 곁다리로 있는 사소한 일들이 거짓이 아니라 우리가 당연히 사실이라고 알려진 일들이 실제로는 뻥인 것이 많습니다.
대표적인 것 몇 가지 예를 들어 봅니다.
( 레퍼런스는 임용한 선생님의 글과 네이버와 구글 지식을 참조 하였습니다 )
1. 관우는 청룡언월도를 쓰지 않았다.
--> 늠름한 관우의 청룡언월도, 이거 뻥일 가능성 99.9 %
실제 삼국지 연의는 실제로 삼국지의 배경이 되는 3 세기에서 700년이나 지난 송나라 때 ( 우리나라 고려시대 ) 쓰여졌고 그 때부터 전쟁에서 갑옷도 두꺼워지고 말 위에서 사용되는 칼이 생겼다고 한다.
생각해 보라! 말 위에서 싸울 때 칼이 편할까? 창이 편할까?
더구나 옷이나 무기가 발달하지 않은 시대에 말이다.
둔탁하게 창으로 상대방을 밀어내는 것이 칼로 베는 것 보다 훨씬 쉬울 것이다. 그것도 철을 이용한 날카로운 칼이 만들어지기 전에는 말이다.
암튼 훌륭한 장수에게 좋은 무기 하나씩 뭐 이렇게 연상되게 하기 쉽게 하기 위해 이런 말이 생겼을 거라 추측.
당시 연극 할 때도 편했을 것이라 생각이 된다. 긴수염 그리고 청룡언월도는 관우, 털복술이 장팔사모 장비, 방천화극 여포 이런 식으로 말이지
다음은 네이버 검색
실제 삼국지 시대의 전장에서 주로 사용된 무기는 모(矛) - 한자 성어 모순의 그 모 - 와 극(戟)이며 그 외에 칼을 많이 사용하였습니다. 특히 당시 말 위에서는 장수들이 주로 칼을 많이 사용하였으며 마상창술 기술은 아직 낯선 기술이었습니다. 이 마상창술은 강족들이 주로 사용했고, 그래서 강족들과 친하게 지낸 여포가 이들에게서 마상창술을 배워서 뛰어난 무용을 자랑할 수 있었다는 추측도 있습니다.
--> 이것은 베는 것이 아니라 찌르는 것. 창과 방패의 고사에서 보듯 모순은 찌르는 무기
사극에 나오는 대부분의 무기는 바로 이것 '모(矛) ' 임
--> 극(戟) 역시 찌르는 것, 방천화극 역시 이것의 일종
2. 여포와 유비 삼형제는 호로관에서 싸우지 않았다?
( 다음도 네이버 검색 )
‘ 장비와 여포가 겨루기를 50여 합, 이를 지켜보던 관운장이 춤을 추듯 82근짜리 청룡도를 휘두르며 내닫는다···(생략)···마침내 유현덕이 쌍고검을 휘두르며 황종마를 급히 몰아 비스듬히 쳐들어간다. 「나관중삼국지 5회」 ’
여포의 무예가 하늘을 찌르자, 유비 삼형제가 여포와 겨룹니다. 모든 제후들은 이러한 유비 삼형제의 무용에 감탄합니다. 하지만, 유비 삼형제는 여포와 겨루지 않았습니다.
얼마 후 대장군 하진(何進)이 도위(都尉) 관구의(毌丘毅)를 보내 단양(丹楊)으로 가서 모병하게 했다. 선주가 그와 함께 행동하다가 하비(下邳)에 이르러 적(賊)을 만났는데, 힘써 싸워 공을 세우고 하밀승(下密丞-청주 북해국 하밀현의 현승)에 제수되었다. 다시 관직을 버렸다. 그 뒤 고당위(高唐尉-청주 평원국 고당현의 현위)에 임명되었다가 (고당현)령으로 승진했다. (주5) 『촉서』「선주전」
유비는 고당현령으로 승진하여 임관지에 머뭅니다. 반동탁연합군에 참여하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영웅기에는 유비가 참여했다고 나오긴 합니다.
(주5) 영제 말년, 유비는 일찍이 경사(京師-수도)에 있다가 그 뒤 조공(曹公-조조)과 함께 패국(沛國)으로 돌아와 무리를 모았다. 때마침 영제가 붕어하자 천하에 대란이 일었는데, 유비 또한 군을 일으키고 동탁을 토벌하는데 종군했다.[영웅기]英雄記
이 말이 사실인가는 저도 모르겠습니다만은, 아무튼 중요한 것은 유비 삼형제는 여포와 겨루지 않았다는 것이겠지요.
암튼 여포와 싸우지 않았다는 거
3. 화웅과 문추는 관우가 죽인 게 아니다.
--> 인터넷 삼국지에서의 화웅, 동탁의 휘하에 있었다.
금방 돌아오겠습니다. 술은 잠시 맡겨 놓겠습니다. 라고 관우가 말하고 1 합만에 죽었다 함
옛날 친구와 당구 칠 때 제일 마지막 쓰리 쿠션 성공을 못하고 있을 때 많이 썼던 말
‘ 이 커피 식기 전에 난다 ( 경기 끝낸다 ) ’
삼국지 초반기에 나오는 이 장면 관우가 화웅을 죽일 때 한 말을 패러디 한 것이지만 이것 역시 뻥입니다
( 역시 네이버 )
그러나 호진은 여러 장수들과 불화했으므로, 양인성을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했다. 2월, 손견은 병사를 다시 수습하여 양인에서 동탁 군을 크게 쳐부수고, 화웅은 전사해 손견의 손에 효수당했다(양인 전투).
하지만 기병들의 추격이 급해지자, 조무는 말에서 내려 두건을 무덤 사이에 놓고 불을 놓은 후에 풀숲에 엎드려 있었다. 동탁의 기병들이 멀리서 이것을 보자, 불이 있는 주위를 몇겹으로 에워쌌다. 그러나 불이 꺼지자 곧 물러갔다. 손견은 다시 병사들을 수습하여 양인(陽人)에서 동탁군과 싸워대파하고, 동탁의 도독 화웅(華雄) 등의 목을 베었다.『오서』「손견전」
화웅은 관우가 아니라 손견에 의해 죽음을 당했다. 그것도 1:1 싸움이 아니라 여러명에게 밀리다가 죽었음
다음은 문추 ( 안량과 함께 관우에게 죽었다던, 참고로 그 때 관우는 조조 밑에 있었죠 )
( 역시 네이버 )
원소(袁紹)를 섬겼다.
건안(建安) 5년(200년) 2월, 안량(顔良)이 백마(白馬)에서 전사하자 원소는 문추를 연진(延津)으로 보내 조조(曹操)의 진영을 공격하게 하였다.
이에 조조는 순유(荀攸)의 진언에 따라 수송대를 미끼로 사용해 문추군의 대열을 어지럽히게 하였고, 조조는 곧바로 하후돈(夏侯惇)과 하후연(夏侯淵), 허저(許褚)와 서황(徐晃) 등 용맹한 장수들로 하여금 문추의 군사들을 혼란에 빠지게 하여, 결국 문추는 전사한다.
문추 역시 1:1 로 싸우다가 죽은 것이 아니라 조조군에게 쫓기다가 어리버리 갈팡질팡하다가 죽은 것 같음
4 . 도원결의는 거짓이다.
( 역시 네이버 )
우선 그 유명한 도원결의의 대목을 볼까요? 나관중 삼국지 본문을 봅시다.
‘ 이튿날, 도원에서 유비와 관우, 장비가 검정 소와 흰 말 한 마리에 갖은 제물을 차려놓고 서로 분향재배하고 맹세하였다.하늘에 맹세하기를 마치자 관우는 현덕에게 절하여 둘째가 되고, 장비는 현덕과 운장에게 차례로 절하여 막내가 되었다. 「나관중삼국지 1회」 ’
유비와 관우, 장비는 서로간에 형제의 의리를 맺었지만 정사에서는 도원결의가 언급되지 않습니다.
관우(關羽)는 자(字)가 운장(雲長)이고 본래 자(字)는 장생(長生)이며, 하동(河東)군 해(解)현 사람이다. 망명하여 탁군(涿郡-유주 탁군)으로 달아났다.선주(先主-유비)가 향리(鄕里)에서 도중(徒衆-무리)을 모으니 관우는 장비(張飛)와 함께 그를 위해 어모(禦侮-적을 막아냄.절충折衝)했다. 『촉서』「관우전」
장비(張飛)는 자(字)가 익덕(益德)이고 탁군(涿郡-유주 탁군)사람이다. 젊어서부터 관우와 함께 선주(先主-유비)를 섬겼는데,관우가 몇 년 연장이어서 장비는 그를 형으로 섬겼다.『촉서』「장비전」
아마 탁현에서 관우와 장비가 유비를 만나 뭐 유비의 경호원 정도 했겠지.
( 싸움도 못하는 데 그냥 인격적으로 감화되어 부하가 될 리는 없잖아? 돈이 많은 것도 아니고. 이문열의 삼국지에도 이 부분 살짝 언급하는 것 같은데 )
5 . 독우를 매질한건 장비가 아니라 유비였다.
--> 독우를 패는 장비
‘ 독우가 미처 입을 열기도 전에 장비는 다짜고짜 독우의 머리를 움켜잡아 역관에서 그대로 현청 앞까지 질질 끌고 갔다. 관청 문 앞에는 말을 매어두는 기둥이 있었다. 장비는 그곳에다 독우를 붙들어매고, 옆에 있는 버드나무 가지를 꺾어 그의 종아리를 힘껏 때리기를 삽시간, 부러진 버드나무 가지가 10개가 넘었다... 「나관중삼국지 2회」’
나관중 삼국지를 보면, 장비는 독우를 묶어놓고 매질합니다. 여기서 유비는 장비를 만류함으로써 성인군자의 인덕을 다시 한번 보여줍니다. 하지만 장비를 매질한 건 오히려 유비였습니다.
독우(督郵-군郡의 감찰관)가 공적인 일로 (안희)현에 도착했다. 선주가 그를 만나기를 청했으나 거절당하자 곧바로 들어가 독우를 묶고 장(杖) 2백 대를 때렸다. 그리고 인끈을 풀어 그의 목에 걸고는 그를 말뚝(馬枊)에 묶어두고 관직을 버린 채 달아났다. (주
4).『촉서』「선주전」
유비가 독우를 매질했지만, 나관중은 오히려 장비가 독우를 매질했다고 묘사했습니다. 이는 유비의 인덕이 높음을 보여주려는 의도인 듯 합니다.
6. 조자룡의 나이
--> ' 용의 눈물 ' 에서 조자룡 역의 류덕화. 사실은 삼국지 주인공 중
나이가 가장 많을 수 있다는
일단 조자룡에 대해
조운(趙雲) 자룡(AD ?-229)
무용, 충절을 갖춘 장수 조자룡
자가 자룡으로 상산군 진정현 사람이다. 본래 원소 관할에 있다가 그의 인품에 싫증을 느끼던 중 문추에게 쫓기던 공손찬을 위기에서 건져주고 그의 막하에 들어갔다.
- 중략 -
유비가 죽고 유선이 즉위 후 제갈공명이 출사표를 던져 위나라 정벌길에 나섰을 때 이미 칠십이 넘은 나이였지만, 고집을 부려 출병하여 위의 선봉대장 한덕과 그의 네 아들과 모두 싸워 죽였다. 그리고 총대장 하후무까지 사로잡아 용맹이 쇠하지 않음을 보여줬다.
그는 일생 무장으로서 패배를 몰랐고 신하로서도 지성어린 충절을 다해 그의 죽음을 안 후주 유선은 지난날 두 번이나 그를 구해준 것을 생각하며 목놓아 울었다고 한다. 제갈량이 재차 위를 치기에 앞서 세상을 떠난 조운은 천수를 다한 후 성도의 금병산에 묻혔다. 삼국지에 등장하는 여러 장수들 중에서 무용, 충절, 최후 등에서 조자룡 만큼 골고루 다 갖춘 장수는 거의 없다.
삼국지 연의에서는 유비가 조자룡을 만날 때 ‘소년 장군’ 이라는 표현을 쓰며 암튼 관우나 장비 보다는 어린 것으로 표현이 됩니다. 그러나 위의 글에서 보듯 그가 태어난 해는 잘 모르나 죽은 해가 229년이고 죽기 전에 이미 70이 넘은 나이에 출전을 했다고 하니 그의 죽은 나이를 72세 정도로만 잡아도 그의 출생 연도는 157년이 됩니다. ( 대개는 죽은 나이는 정확하게 표현하는 게 정설이지요. 아니면 조자룡이 처음에 잘 보일려고 나이를 줄여 말하다가 관우와 장비가 죽은 후 실제 나이를 밝혔을 수도 )
그러면 유비, 관우, 장비의 정사에서의 실제 나이는?
유비(劉備 : 161~223)
관우(關羽, 160년경[1] ~ 219년) 연의상에선 162년생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161년생인 유비 보다 1살 더 많은 것으로 알려진다.
장비(張飛, 165년 ~ 221년)
이게 뭔가 그러면 조자룡은 유비나 관우 보다도 나이가 많은 게 됩니다.
왠 소년 장군?
뭔가 잘 못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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