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이야기

다산 생가를 다녀와서 ( 임용한 선생님과 함께 )

다린이아빠 2011. 2. 22. 14:54

지난 주말에 평소 존경하던 역사학자 임용한 선생님과 산행을 했다.

 

( 임용한 선생님의 조선 국왕 이야기를 읽고 엄청나게 감명을 받았는데 인터넷으로 어찌어찌해서 연락이 닿아서 산행을 같이 하게 되었다 )

 

산행 후에 다산 정약용 선생님 생가에 들르게 되었다.

 

 

 

 

--> 수종사에서 바라 본 한강. 밑에 보이는 강은 북한강과 남한강이 합쳐지는 곳 그래서 이 곳을 양수리라고 한다.

이 나무는 은행나무인데 500년 되었다고 한다. ( 안내판 세울 때가 1982년 이때 500년 이니까 내 계산으로는 519년 된 것임) 이렇게 큰 나무는 처음 보는 듯

 

 

‘불우’ 라는 말처럼 자주 쓰이면서 그 뜻을 잘 모르고 쓰는 말도 흔치 않은 것 같다. ‘불우(不遇)’ 의 ‘우(遇)’ 자는 ‘만나자’의 뜻이다. 이 말은 무언가를 만나지 못한다는 뜻이 된다. 물고기는 물을 만나야 하고, 용마는 장군을 만나야 하며, 아리따운 공주는 백마 탄 기사를 만나야 한다. 무엇이든 세상에 나올 때는 그것이 가장 잘 쓰일 만한 여건을 제대로 만났을 때 제 기량을 십분 발휘하는 법이다.

 

아무리 뛰어난 천리마가 있어도 알아볼 사람이 없으면 잡종마 사이에 끼여서 따돌림이나 당하는 것이 세상의 이치다. 이리하여 ‘ 불우한’ 이라는 관형어가 가장 잘 어울리는 사람이 있다면 ‘ 천재’ 일 것이다. 타고난 능력은 천재임이 확실하나 그 천재성을 발휘할 여건이 마련되지 못했을 때, 우리는 그를 일러 ‘ 불우한 천재’ 라고 한다.

 

아마도 정약용이 그런 사람일 것이다.

 

보통 사람이 평생 읽을수 없을 분량의 저술 활동을 했다.

거중기를 이용하여 우리나라 최고의 성인 수원성을 만드는 데 큰 기여를 했고 실학의 대명사다.

 

정조의 총애를 받았으나 당파싸움으로 인해 능력 만큼의 뜻을 펼치지 못했고 결정적으로 정조의 죽음으로 인해 몰락하고 만 인물.

 

혹자는 정조가 독살되지 않았더라면 다음 영의정 순서는 정약용이었다는 말을 한다.

 

지금도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학생 시절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인물이 바로 정약용이었다.

 

 

 

--> 다산은 자신의 호도 자신이 여러 개 지었다고 한다. 자부심의 발로 였는지 자신 만이 자신의 호를 지을 수 있었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다산이란 호는 전라도 강진 유배 생활에서 유배지가 차 밭이 많아서 사람들이 그렇게 불러서  茶山 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나도 산부인과 의사니 多産  이라 지어볼까?

 

 

 

( 지금부터 이야기는 임용한 선생님의 말씀이다. 이거 아직 본인은 글을 쓰시지도 않았는데 써도 되는 지 잘 모르겠지만 너무나 소중한 말씀이기에 들은 것을 적어 본다 )

 

정약용은 엄청난 노력가였다고 한다.

 

글을 너무 열심히 쓴 나머지 치질이 생기고 - 조정래 선생님과 비슷하다 오래 앉아 있으면 치질이 생긴다 -치질이 생기자 방석을 이용하였는데 이것 마저 힘들자 서서 벽에 기대여 글을 썼다고 한다. 말년에 중풍이 생겼는데 붓을 들 힘이 없자 손에 붓을 묶어 글을 쓰셨다고 한다.

 

이렇게 글이 나오기 까지 그 배경이 되는 그의 독서량은 상상을 초월 하였다고 한다.

 

당연하게도 자신에 대한 호학이나 박식에 대한 자부심이 강했다고 알려진다.

( 누가 뭐라고 주장하면 ‘ 너 그거 읽어 봤어? 읽지 않았으면 말을 말어’ 뭐 이런식으로 말이다.) 이런 태도로 다른 사람을 무시하는 행동을 많이 했다고 한다. 지도자로서의 관대함은 좀 부족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아무리 책을 많이 읽어도 단순하게 정보량만 늘린다면 정치를 하거나 지도자가 될 수 없다. 읽은 정보를 자기 지식으로 만들려면 서로 다른 목소리를 내는 정보를 정리, 분석하는 능력을 키워야 한다. 컴퓨터에 비유하자면 정보를 저장하는 하드의 용량만 커서는 고급 컴퓨터가 될 수 없고, 한 번에 띄우는 RAM 과 CPU의 능력이 컴퓨터의 수준을 결정하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책을 100번 읽는 것 보다 10권의 책을 비교, 정리 분석하는 과정이 더욱 힘들 듯이 말이다. 그런데 그의 글은 하드 용량만 많은 컴퓨터처럼 수 많은 레퍼런스와 엄청난 양을 자랑하지만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고 한다.

 

진짜 학자와 사이비를 구분하는 기준은 경전마다 다방면의 학설과 주석서를 참조하여 각각의 이치와 논리체계를 이해하고 이를 토대로 더욱 깊은 생각을 하면서 결론을 내는 것 이것이 학자의 기본 자세인데 아무래도 다산은 결론을 내리는 타입은 아니였던 모양이다.

 

요즘 보다 더하게 조선시대에는 문구를 외워서 안다고 잘난척 하는 사람들이 많았던 모양인데 아무래도 다산은 그런 경향이 좀 있었나 보다.

 

 

--> 여유당 이라고 적힌 현판. 다산의 생가 사진. 홍수 때 소실 되었던 것을 다시 지었다고 한다.

 

 

 

그의 대표작인 목민 심서

 

지방관이 갖춰어야 할 덕목에 대해 기술한 것인데 목민심서에 쓰인 한자는 너무 어려워 우리나라에서 이 책을 해석 할 수 있는 사람은 한 손가락으로 꼽힌다 한다.

 

( 실제로 정약용은 정조와 한자 내기 시합을 많이 했다고 알려졌다. 어려운 한자 맞추기. 정조와 딱 수준이 맞지 않나? 잘난 척 하기 한자 많이 알아서 뭐에 쓰나? 일정 수준 되면 vocabulary의 양은 영어 실력과 큰 의미가 없다. )

 

목민심서를 정말 지방관과 백성들이 읽기를 바랐다면 한글까진 바라지 않더라도 쉽게 써야 할 것이다. 당연히 그랬어야 하고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전문적 지식들이 좀 쉽게 노출이 잦은 매체 - 인터넷도 좋고 -에 기고되어야 된다고 믿는다.)

 

다산은 본인에 대한 자부심도 대단하여 ‘ 본인의 묘비명 ’ 도 본인이 직접 썼다고 한다. 자신보다 훨씬 못한 다른 어떤 이가 본인의 묘비명을 쓴다는 사실이 용납이 안 되었던 것이다. 본인이 묘비명을 썼을 때 보다 약 15년 더 살았기 때문에 당연하게도 묘비명에는 실제 그가 썼지만 묘비명에는 기록 되지 않은 것들도 있었다.

 

다산의 가장 큰 업적이라고 알려져 있는 수원성의 건설. 혹시 일본에 가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오사카 성을 기억 할 것이다.

 

오사카 성은 실제로 수원성보다 300년 가까이 전에 만들어진 것인데 오사카 성이 수원성 보다 훨씬 잘 만들어졌다.

 

우리가 그렇게 자랑하는 수원성을 만들기 위해 다산은 외국에 나가 보는 대신 송나라 ( 그 당시로부터 약 800년전 ) 때 성의 설계도를 가져오라고 하여 성을 만드는 데 참고 한다. 물론 우리나라 기준으로 봐서는 잘 만들어진 성이지만 비교를 하려면 다른 나라의 성과 비교를 하는 게 맞다.

( 여기서 임용한 선생님은 그 당시 우리나라의 수준이 다른 나라 보다 200년 이상 뒤쳐졌었다고 말씀하셨다 )

 

경세 유표에 관해서는 다산이 참조한 책이 주례 라는 사실을 주지해야 한다. 주례는 기원전 1000년 그러니까 약 3000년 전 주나라의 법을 참고한 것이다. 3000년이 흘렀는데 어찌 만물의 제도가 같을 수 있겠는가? 사회상도 변하고 인식도 변화하고 시대도 발전했는데 말이다. 한 마디로 현실성이 없었던 것이고 현실에 적용하기에 무리가 있었던 것이다.

 

우수갯 소리로 다산의 저술을 그냥 빼끼기만 하는 것도 불가능 하다고 이야기 한다. 그 저술의 양에 짓눌린 나머지 다산의 평가를 말 할 때는 조심을 넘어서 금기시 하는 경향이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러나 이제는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다산의 학문에 대한 열정, 애민 정신과 별개로 그가 한 것과 하려고 했던 것 그리고 시행하려고 했던 방법이 모두 옳은 것은 아니라는 것이라는 사실 그리고 현재 다산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교훈에 대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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