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좋아하는 임용한 선생님의 글입니다.
소말리아 해적 사건이 요즘 한참이라 옛날 읽었던 책에서 한번 옮겨 보았습니다.
( 조선 국왕 이야기 )
지리한 정치 이야기는 그만하고, 푸른 바다로 장면을 옮겨보자. 문무의 재능을 겸비한 왕이었던 태종은 그의 치세의 마지막에 장쾌한 사업을 하나 벌인다.
바로 왜구의 소굴이요 전진기지였던 대마도 정벌이었다.
공식적으로 보면 대마도 공격은 세종 치세의 일이다. 그러나 이 때 병권은 상왕이던 태종이 쥐고 있었고, 원정의 준비에서 마무리까지 전 과정을 태종이 직접 주관하였으므로 태종의 업적으로 다루어야 한다.
아무리 명분이 훌륭하다고 해도 전쟁은 인간의 역사에 등장하는 가장 불행한 사건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므로 그 자체를 자랑거리로 삼아서는 안 된다.
전쟁의 배후에는 오랫동안 축적된 거창한 원인이 있다고 하여도 많은 전쟁이 그렇듯 시작 자체는 우연에서부터 시작한다.
세종 1년 5월 대마도의 전투병력이 총출동하는 대원정이 감행되었다. 그래도 조선에 다행스러웠던 것은 이 때는 조선의 군비도 정비되고 그간의 회유정책에 따라 교역로도 열어 주고 식량도 주고 하여 왜구가 중국보다는 조선을 가까운 상대로 생각했다는 점이다.
조선도 전라도 해역에서 이들의 움직임을 탐지했으나 이들의 행선지가 중국임을 알아내고 안심하였다.
포구를 점거한 왜구는 상륙하여 비인현 읍성을 포위하고 주변을 약탈했다.
놀란 정부는 서해 해안에 비상경계령을 내리고, 병력을 파견했다.
태종의 추진력과 의지 덕분에 227척의 병선과 1만 7,285명의 원정군이 신속하게 조직되었다. 총지휘관은 유정현이었지만 그는 문관으로 형식적인 총지휘관이고 실제 사령관은 이종무가 맡았다. 전군을 좌․중․우 삼군으로 구분하고, 각 군마다 3명씩 절제사를 두었다.
거제에 집결한 원정군은 6월 17일 65일분의 식량을 탑재하고 대마도를 향해 출발했다. 나흘 후 오시(11~1시) 무렵 10여 척의 선발대가 대마도 두지포에 접근했다. 긴장 속에 해안으로 향하던 상륙부대는 대마도인들의 환호성과 환대에 웃음을 머금어야 했다. 조선이 쳐들어오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대마도인들은 조선 해군을 중국에서 귀환하는 일본배로 착각하여 해안에서 잔치까지 벌이며 이들을 맞았기 때문이다.
고사작전을 계속했더라면 아주 괜찮았을 것 같은데, 일이 꼬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 날 이 전술을 쓰기에는 결정적인 문제가 하나 있었다. 공격측과 수비측, 홈팀과 어웨이팀이 바뀌어 있다는 점이다. 뿐만 아니라 일본군은 조선군의 행동을 미리 예측하고 있었다. 고지로 이동하는 조선군의 위에서 다시 복병이 튀어나왔다.
이러니 백병전에 더욱 자신을 잃어버린 병사들은 마구 도주하기 시작했다. 너무 형편없이 무너져서 적의 칼에 맞아 죽은 사람도 있지만, 벼랑으로 뛰어내리거나 떨어져 죽은 사람도 많았다. 조선군은 무참하게 포구로 달아났고, 이 양상을 본 일본군은 병력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포구까지 추격해 왔다.
상황은 점점 더 심각해졌다.
이렇게 해서 대마도 전투는 끝났다.
해프닝처럼 치러진 이 날의 전투에서 조선군은 180명의 전사자를 보았고, 왜구는 20명 좀 더 되는 피해를 보았다.
정벌군이 귀향했지만 상황 끝은 아니었다. 왜구의 주력을 말살하기 위해 태종은 함대를 거제도에서 머물러 두고 귀향하는 왜구를 요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며칠 후 왜선이 안흥량에 침입하여 병선 9척을 탈취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귀향하는 왜구가 조선연안에 접근했다는 신호였다. 그런데 이후 조선군의 대응과 왜군의 동향에 대해서는 전혀 기록이 없다.
어쩌면 이 공격은 조선군의 주의를 돌리기 위한 교란작전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여간 왜군은 조선 수군의 눈을 피하는 데 성공하여 무사히 조선 영해를 빠져나갔다.
화가 난 태종은 다시 대마도로 출정할 것을 명령했다. 그러나 태풍의 우려도 높고 왜구가 중국에서 무참하게 패했다는 얘기를 듣고, 공격을 취소하였다.
태종은 대마도주에게 지금은 날씨 때문에 이 정도로 끝내지만 또 도발하면 다음에는 10만 병력으로 원정하겠다는 협 박조의 편지를 보내는 것으로 원정을 마무리했다.
요동으로 갔던 왜구는 요녕 영해현 동남인 망과에서 총병 유강의 군대에게 참패를 당했다. 조선에서 사전에 통보해 준 덕택에 중국군이 미리 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왜구는 분을 못 참아 비인현에서 납치했던 조선인 포로 40여 명을 학살했다.
이 전투는 중국인 학자가 쓴 중국사 개설서에까지 등장한다.
이 일전으로 왜구는 너무 큰 타격을 입어 이후 100년간 중국 해안이 평온해졌다고 평가할 정도였다. 공식적인 통계에 따르면 목을 획득한 것만 1,500에 포로 103명이었다.
통상적으로 부상자와 목을 얻지 못한 사망자는 그 몇 배라는 점을 감안하면 아무리 적게 잡아도 5천 이상의 사상자가 난 엄청난 피해이다.
이 정도면 충분히 만족스러운 전쟁이었다. 그러나 그 뒷얘기는 좀 상큼하지 않다.
사
령관이었던 이종무는 제비뽑기 사건과 부하 장수 하나를 자신이 직접 천거해서 데려간 일로 대간들의 집중공격을 받았다. 공적과 전시상황이라는 점을 참작하면 용서할 수도 있는 잘못이고, 그 무관도 왕의 허락을 받고 데려간 것인데, 관료들은 이 사건으로 무관의 지위가 상승하는 것을 우려했던 것 같다. 결국 이종무는 유배형을 받았으나 유배길에 병이 났다는 이유로 과천 농장에 머무르다가 몇 년 후에 용서를 받았다. 언제나 그렇듯 정치적인 재판과 적당한 얼버무리기였다.
대답은 역사책 안에 있다.
이 건의가 별로 탐탁지 않았던 태종은 일단 중국인들이 전투를 목격했는지 안 했는지부터 알아보자고 했다. 통역관을 보내 물었더니 조선측의 의도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던 이들은 핵심적인 장면을 술술 불었다.
역관의 보고를 받자 내심 송환할 생각이 있었던 태종은 난감해졌다. 궁박한 김에 역관에게 말을 걸었다.
“그래 자네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의외로 역관은 시원시원하게 대답했다.
“ 중국 군사도 타타르족(몽고의 일족)을 토벌하다가 반이 죽은 일이 있습니다. 100명 정도 죽은 것이 무어 그렇게 부끄럽습니까?”
옛 사람의 소심증을 비웃지 말자. 정말 소심한 사람은 따로 있다.
언제부터인가 우리의 관념에는 역사란 자랑스럽고, 우리의 기상을 고양시키고,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는 것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알게 모르게 자리잡게 되었다.
특히 70년대 이후로 진취적 기상과 뭐 그런 것을 좋아하게 되면서 역사를 뒤져 이런 기록들을 닥치는 대로 찾아내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창피한 이야기는 빼고, 사건의 일면만을 이야기하거나, 심하면 결론만을 강조할 뿐 사실과 배경설명을 빼 버리는 경우가 발생했다. 대마도 정벌이 바로 그런 예의 하나이다. 대마도 정벌을 했다는 서술은 많으나 그 진상을 적어 놓은 책은 거의 없다시피 하다.
호연지기도 좋고, 정신보양도 좋지만 그것만이 역사의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이것이 지나치면 역사가 소재와 결론 중심으로만 흐르고, 사실 분석이 빠져 버린다. 역사공부를 왜 하는가? 따지고 보면 인간과 사회에 대한 이해와 분석 능력을 고양시키는 것이 제일 가는 목적이요 기능이다.
어떤 훌륭한 명분을 사용한다고 해도 이 부분을 사장시켜 버리고, 결과만을 선전하는 플래카드 역할만 한다면 역사라는 이름으로 죄를 짓는 것이다.
그 역관의 말대로 그리고 태종의 생각대로 작은 패전이 무어 그리 큰일이겠는가? 더욱이 백병전을 잘하고 못하는 것은 민족의 총체적인 자존심을 걸고 비교해야 할 소재가 되지 못한다. 과학무기가 발달한 근대 이후에는 국력과 군사력이 일치할 수 있으나 전근대 사회에서는 각 민족이 처한 환경과 사회구조상의 특성에 따라 군사력의 성격과 강도는 달라진다.
몽고와 같은 유목민 사회는 중국과 한국에 비하면 대단히 후진적인 사회이다.
하지만 말과 함께 살며 떠도는 생활특성과 부족사회가 주는 집단적인 단결성 때문에 야전에서는 어떤 문화권의 군대도 당할 수 없는 무적의 기병대가 된다.
전통적으로 조선군의 장점은 기마와 활이었다. 그래도 고려 때까지는 백병전도 꽤 잘했다. 백병전을 잘하려면 무술이 뒷받침되어야 하고, 그러려면 전문적이고 지속적인 훈련을 받은 무인계층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고려에서는 전문 군인층이 있고, 향리와 같은 사회의 중간지배층이 상당수 무(武)를 업으로 했다. 군대는 이런 중간 무사층을 기간으로 사적․지역적 연고에 따라 조직되었다. 또 사원이 자기 영지를 가지고 특권적인 권력을 누림에 따라 중국 소림사 승려와 같은 전문적인 무인 승려를 많이 양성했다. 그러나 이 체제는 백병전에 장점이 있는 반면, 향촌사회의 지배층들이 거칠고, 토호적이 되며, 국가체제가 지방분권적이 되고, 무인정권의 성립에서 보듯이 쿠데타와 사회혼란이 자주 발생하는 약점이 있는 것이다.
고려의 경험을 바탕으로 조선에서는 국가에서 징병하는 일반 농민군의 비중을 높였다.
당연히 병사의 개별 전투력이 떨어졌고, 이들의 주무기는 창검이 아닌 활이 되었다. 총이 전쟁의 역사를 바꾼 것은 군인이 되는 시간을 3주로 줄였기 때문이다. 아직 총이 없던 시절이지만 우리의 군략가들은 활의 기능에 주목해서 활에 의존하는 부병제를 창출해 냈다.
그러나 총과 달라서 활만으로는 백병전 위주의 전쟁을 사격전으로 바꿀 수가 없었다. 이렇게 되자 수비에는 강하지만 평지전투와 공격에는 영 전력이 신통치 않았다. 군관, 한량 들과 같은 전문무사들이 있기는 했지만 역시 기마와 활이 장기였다. 백병전에서는 기병대가 더 효과적이지 않느냐고 말할 수도 있으나 기병대로 행하는 백병전은 한계도 많다. 아무래도 이들은 수가 제한되고, 엉성한 군대에는 강하지만 조직적인 군대나 공성전, 험한 지형에서는 위력이 제한되었던 것이다.
정말 창피한 것은 이런 작은 일에 민족적 자존심을 걸고, 대의를 손상시키는 소심함이다.
대마도 정벌은 사실 작지 않은 의의가 있다.
하지만 그것이 드디어 복수를 했다거나 우리 역사에서 손꼽을 수 있는 정복전쟁의 하나라는 그런 것이 아니다.
내우외환에 시달리던 14세기의 양상은 태조편에서 조금 설명을 했다.
그 시대가 오늘과 멀고, 사료가 많지 않아 그렇지 차분히 생각과 상상을 더해서 보면 얼마나 참혹하고 한심한 시대였는가 말이다.
이 시대의 사회상을 그려볼 때마다 다른 부분은 몰라도 이성계를 찾아 길을 떠나는 정도전의 분노만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그러한 분노는 당시에 정도전만이 품었던 것은 아니다.
이름도 남기지 못한 수많은 사람들이 이 허망하다시피 한 현실에 분노하고 고민했다.
이 전쟁의 참된 의미는 해적떼의 공격에 나라의 주요 도시가 떨어지고, 수도가 위협받을 정도로 엉망이 되었던 국가가 이제 완전히 건강을 회복하였음을 증명했다는 점에 있다.
그리고 이 공로는 고려사회의 현실을 두고, 고민하고 행동했던 개혁파 사류 모두에게 돌려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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