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이야기

태종 때 대마도 정벌

다린이아빠 2011. 1. 30. 21:01

제가  좋아하는 임용한 선생님의 글입니다.

 

소말리아 해적 사건이 요즘 한참이라 옛날 읽었던 책에서 한번 옮겨 보았습니다.

( 조선 국왕 이야기 )

 

 

지리한 정치 이야기는 그만하고, 푸른 바다로 장면을 옮겨보자. 문무의 재능을 겸비한 왕이었던 태종은 그의 치세의 마지막에 장쾌한 사업을 하나 벌인다. 


바로 왜구의 소굴이요 전진기지였던 대마도 정벌이었다.


 공식적으로 보면 대마도 공격은 세종 치세의 일이다. 그러나 이 때 병권은 상왕이던 태종이 쥐고 있었고, 원정의 준비에서 마무리까지 전 과정을 태종이 직접 주관하였으므로 태종의 업적으로 다루어야 한다.

 

아무리 명분이 훌륭하다고 해도 전쟁은 인간의 역사에 등장하는 가장 불행한 사건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므로 그 자체를 자랑거리로 삼아서는 안 된다. 

그러나 대규모 전쟁일수록 그것이 지니는 사회적 충격과 역사적 의미도 적지 않으므로 역사에서는 이를 다루지 않을 수가 없다.

 

전쟁의 배후에는 오랫동안 축적된 거창한 원인이 있다고 하여도 많은 전쟁이 그렇듯 시작 자체는 우연에서부터 시작한다. 

세종 1년 대마도에 심한 흉년이 들었다. 기후가 정상적일 때도 식량을 자급하지 못하던 섬이었던 만큼 기근이 섬을 휩쓸었다.

 어떤 사람들은 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어떤 사람들은 자신들의 가혹한 운명을 탓하며 재워 두었던 무기와 배를 끄집어냈다.

세종 1년 5월 대마도의 전투병력이 총출동하는 대원정이 감행되었다. 그래도 조선에 다행스러웠던 것은 이 때는 조선의 군비도 정비되고 그간의 회유정책에 따라 교역로도 열어 주고 식량도 주고 하여 왜구가 중국보다는 조선을 가까운 상대로 생각했다는 점이다. 

해적선단은 조선이 아닌 요동을 약탈의 대상으로 정했다. 

조선의 해안선을 따라 발해만까지 쭉 올라가는 항로였던 만큼 이들이 눈앞에 펼쳐진 땅을 애써 외면하며 지나쳐 간 정성은 인정해 주어야 한다.

 

조선도 전라도 해역에서 이들의 움직임을 탐지했으나 이들의 행선지가 중국임을 알아내고 안심하였다. 

그러나 이 때가 음력 5월 즉 양력 6월이니 벌써 일기가 고르지 않은 시기이다. 해적선단은 중도에 폭풍을 만나 일부 부대가 낙오했다. 식량과 물이 부족해진 이들의 눈앞에 조선의 연안이 펼쳐져 있었다.

며칠 후 왜선 50척이 충청도 비인현에 들이닥쳤다. 포구에는 병선과 수군이 있었으나 기습에 당하여 병선 7척이 불타고 37명이 전사했으며 수십 명이 포로로 잡혀갔다. 

아군 지휘관은 뒤늦게 분전하여 이 무리의 두목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으나 아들은 전사하고, 화가 난 조정은 서둘러 그를 처형 시켜 버렸다.

 

포구를 점거한 왜구는 상륙하여 비인현 읍성을 포위하고 주변을 약탈했다.

 읍성을 둘러싼 공방전은 오전 7시부터 4시간이나 지속되었다. 성이 거의 떨어질 뻔했으나 마침 이웃고을에서 원군이 도착하여 겨우 왜구를 몰아냈다.
놀란 정부는 서해 해안에 비상경계령을 내리고, 병력을 파견했다.

 며칠 후 황해도 해주에서 물을 길으려고 상륙한 왜구 하나를 초병이 붙잡았다. 이 자의 입을 통해 비로소 조선에서는 이 갑작스런 사태의 진상을 알아냈다.

놀랄 정도로 신속하게 태종은 어전회의를 소집하여 대마도 공격을 안건으로 올렸다. 대신들은 원정에 반대하고, 왜구가 돌아가는 길에 요격하자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태종은 언제까지나 약하게만 보일 것이냐? 이래서는 뒷날의 환이 끝이 없다고 질타하고는 대마도가 빈 틈을 타서 이 곳을 소탕하고, 처자를 인질로 붙잡아 온다. 그리고 원정군을 거제도에 재집결시켜 중국에서 돌아오는 왜구도 요격 섬멸하자는 방안을 밀어붙였다.

 

태종의 추진력과 의지 덕분에 227척의 병선과 1만 7,285명의 원정군이 신속하게 조직되었다. 총지휘관은 유정현이었지만 그는 문관으로 형식적인 총지휘관이고 실제 사령관은 이종무가 맡았다. 전군을 좌․중․우 삼군으로 구분하고, 각 군마다 3명씩 절제사를 두었다.

 

거제에 집결한 원정군은 6월 17일 65일분의 식량을 탑재하고 대마도를 향해 출발했다. 나흘 후 오시(11~1시) 무렵 10여 척의 선발대가 대마도 두지포에 접근했다. 긴장 속에 해안으로 향하던 상륙부대는 대마도인들의 환호성과 환대에 웃음을 머금어야 했다. 조선이 쳐들어오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대마도인들은 조선 해군을 중국에서 귀환하는 일본배로 착각하여 해안에서 잔치까지 벌이며 이들을 맞았기 때문이다.

덕분에 조선군은 쉽게 포구를 점거했고, 환호하던 대마도인들은 혼비백산하여 산속으로 도주하였다. 포구를 점거한 조선군은 주변 마을을 소탕하여 배 129척을 탈취하여 불사르고, 1,939호의 민가를 불태웠다. 이 과정에서 일본군 114명을 살해하고, 조선인 남녀 131명을 되찾았다.

대마도인들은 급하게 도주하였으므로 식량도 제대로 챙겨가지 못했다. 많이 챙겨간 자도 겨우 1~2말의 식량밖에 가져가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아낸 조선군은 쾌재를 부르고 고사작전을 썼다. 요소요소에 목책을 세워 산에서 나오는 길목을 차단하고, 주변의 마을과 포구를 돌아다니면서 밭의 곡식을 불살랐다.

전황보고를 받은 태종은 의기양양하여 호기있게 대마도주 종정성(宗貞盛)에게 섬 전체가 항복해 오면 살 곳과 의복, 식량을 바라는 대로 해결해 주겠다는 편지를 보냈다. 

신하 중 한 명이 이 편지를 보고 그 양을 어떻게 감당하느냐고 하자 태종은 그깟 몇 천 명을 더 먹이지 못하느냐고 큰 소리를 쳤다.

 

고사작전을 계속했더라면 아주 괜찮았을 것 같은데, 일이 꼬이기 시작했다. 

조선군 지휘부에서는 포구에 걸터앉아서 빈 마을이나 태우고 돌아다니는 것이 마음에 걸리기 시작했다. 

회군했을 때 전투를 회피했다는 비난을 들을 우려도 있었다. 언제나 무언가 가시적인 행동을 하고 주기적으로 성과를 제출해야 하는 것이 관료주의의 영원한 병폐인 것이다.

그래서 6월 26일에 한 번 싸웠다는 기록을 남기기 위하여 부대를 상륙시켜 내륙으로 들여보냈다. 그런데 그 방법이 아주 졸렬했다. 9명의 절제사에게 제비를 뽑게 하여 재수 없는 부대 하나를 선발했던 것이다. 처음부터 기록을 의식한 행위였다는 의심을 지울 수 없는 부분이다. 불운한 당첨자는 좌군절제사 박실이었다. 기해일에 이종무는 중군을 거느리고 배에 남고, 좌군과 우군이 상륙했다. 

각 군은 3명의 절제사가 인솔하는 3부대로 구성되었는데, 제비 뽑은 대로 박실 부대만 진군시키고 다른 부대는 남았다.

이러니 박실 부대의 사기가 높을 리가 없었다. 박실 부대가 홀로 산으로 들어서자 매복했던 왜구가 과감하게 돌격해 왔다. 병력은 조선군이 우세했지만 왜구가 돌격해 오자 조선군은 맞받아 싸우지 않고 높은 지대로 이동했다. 

비겁하게 도망한 것은 아니다. 오랫동안 왜구와 싸워 온 덕에 조선군도 왜구와 대적하는 나름의 전술이 있었다. 백병전에 약한 대신 활과 기마술이 장기였던 조선군은 왜구와 부딪히면 정면대결을 피하고 높은 지역에서 수비대형을 펼치고, 활로 공격함으로써 승리를 많이 얻었었다.

 

 

그런데 이 날 이 전술을 쓰기에는 결정적인 문제가 하나 있었다. 공격측과 수비측, 홈팀과 어웨이팀이 바뀌어 있다는 점이다. 뿐만 아니라 일본군은 조선군의 행동을 미리 예측하고 있었다. 고지로 이동하는 조선군의 위에서 다시 복병이 튀어나왔다. 

이미 기가 꺾여 있던 상황에서 재차 복병을 만나자 조선군의 대열은 걷잡을 수 없이 무너졌다. 조선군의 약점을 알고 있던 왜구는 처음부터 군관을 노렸는지 조선군측의 직업군인이요 무사들인 편장, 부장들이 전사해 버렸다.

이러니 백병전에 더욱 자신을 잃어버린 병사들은 마구 도주하기 시작했다. 너무 형편없이 무너져서 적의 칼에 맞아 죽은 사람도 있지만, 벼랑으로 뛰어내리거나 떨어져 죽은 사람도 많았다. 조선군은 무참하게 포구로 달아났고, 이 양상을 본 일본군은 병력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포구까지 추격해 왔다.

 

 

상황은 점점 더 심각해졌다. 

배에 있던 군사들은 이 광경을 보고도 꼼짝하지 않았고, 주변에 상륙해 있던 좌군과 우군도 엄호조차 하지 않았다. 

포구로 도주한 병사들은 어지러이 배로 올랐고, 이 과정에서도 많은 병사가 살해되었다. 보다 못해 우군 절제사 이순몽이 단독으로 부대를 몰고 나가 포구의 작은 산에 진을 치고, 왜군을 요격했다. 이 덕에 왜군은 박실 부대의 추격을 중단해야 했다.

 미련이 남은 왜구는 이순몽 부대를 공격했으나 조선군의 장점을 살려 산 위에서 수비대형을 갖추고 있는 이 부대를 쉽게 공략할 수는 없었다.


이렇게 해서 대마도 전투는 끝났다.


 해프닝처럼 치러진 이 날의 전투에서 조선군은 180명의 전사자를 보았고, 왜구는 20명 좀 더 되는 피해를 보았다.

 

기가 꺾인 조선군은 바로 철수하여 7월 3일에 거제도로 돌아왔다. 여기에는 이미 한여름이라 일기도 좋지 않고, 중국으로 출정한 선단이 돌아올 때도 되었다는 여러 가지 계산이 작용하였다. 이 때 계획대로 대마도인 포로도 꽤 잡아왔다. 정확한 숫자는 알 수 없으나 이 중에는 지도자급인 인물도 있고 해서 이후 대마도인들의 태도는 매우 공손해졌다.

정벌군이 귀향했지만 상황 끝은 아니었다. 왜구의 주력을 말살하기 위해 태종은 함대를 거제도에서 머물러 두고 귀향하는 왜구를 요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며칠 후 왜선이 안흥량에 침입하여 병선 9척을 탈취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귀향하는 왜구가 조선연안에 접근했다는 신호였다. 그런데 이후 조선군의 대응과 왜군의 동향에 대해서는 전혀 기록이 없다. 


어쩌면 이 공격은 조선군의 주의를 돌리기 위한 교란작전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여간 왜군은 조선 수군의 눈을 피하는 데 성공하여 무사히 조선 영해를 빠져나갔다.

화가 난 태종은 다시 대마도로 출정할 것을 명령했다. 그러나 태풍의 우려도 높고 왜구가 중국에서 무참하게 패했다는 얘기를 듣고, 공격을 취소하였다. 


태종은 대마도주에게 지금은 날씨 때문에 이 정도로 끝내지만 또 도발하면 다음에는 10만 병력으로 원정하겠다는 협 박조의 편지를 보내는 것으로 원정을 마무리했다.

 

실제로 중국에서 벌어진 격전은 대단한 것이었다.


 요동으로 갔던 왜구는 요녕 영해현 동남인 망과에서 총병 유강의 군대에게 참패를 당했다. 조선에서 사전에 통보해 준 덕택에 중국군이 미리 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왜구는 분을 못 참아 비인현에서 납치했던 조선인 포로 40여 명을 학살했다.

이 전투는 중국인 학자가 쓴 중국사 개설서에까지 등장한다. 


이 일전으로 왜구는 너무 큰 타격을 입어 이후 100년간 중국 해안이 평온해졌다고 평가할 정도였다. 공식적인 통계에 따르면 목을 획득한 것만 1,500에 포로 103명이었다. 


통상적으로 부상자와 목을 얻지 못한 사망자는 그 몇 배라는 점을 감안하면 아무리 적게 잡아도 5천 이상의 사상자가 난 엄청난 피해이다.

이 정도면 충분히 만족스러운 전쟁이었다. 그러나 그 뒷얘기는 좀 상큼하지 않다.

령관이었던 이종무는 제비뽑기 사건과 부하 장수 하나를 자신이 직접 천거해서 데려간 일로 대간들의 집중공격을 받았다. 공적과 전시상황이라는 점을 참작하면 용서할 수도 있는 잘못이고, 그 무관도 왕의 허락을 받고 데려간 것인데, 관료들은 이 사건으로 무관의 지위가 상승하는 것을 우려했던 것 같다. 결국 이종무는 유배형을 받았으나 유배길에 병이 났다는 이유로 과천 농장에 머무르다가 몇 년 후에 용서를 받았다. 언제나 그렇듯 정치적인 재판과 적당한 얼버무리기였다.

 

대마도에서 되찾아온 포로 중에는 중국에서 납치당한 중국인 11명이 있었다. 조정의 신하들은 그들을 송환해서는 안 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이들이 대마도에서 조선군이 형편없이 패전하는 모습을 목격했기 때문에 이들이 돌아가면 조선 군대의 실상이 중국에 알려진다는 이유였다. 어찌 보면 그럴 듯하기도 하고, 달리 생각하면 이런 게 바로 소아병 혹은 관료들의 고질병인 복지부동적인 과민반응이 아닌가도 싶다. 독자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대답은 역사책 안에 있다. 


이 건의가 별로 탐탁지 않았던 태종은 일단 중국인들이 전투를 목격했는지 안 했는지부터 알아보자고 했다. 통역관을 보내 물었더니 조선측의 의도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던 이들은 핵심적인 장면을 술술 불었다. 


역관의 보고를 받자 내심 송환할 생각이 있었던 태종은 난감해졌다. 궁박한 김에 역관에게 말을 걸었다. 


“그래 자네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의외로 역관은 시원시원하게 대답했다.


 “ 중국 군사도 타타르족(몽고의 일족)을 토벌하다가 반이 죽은 일이 있습니다. 100명 정도 죽은 것이 무어 그렇게 부끄럽습니까?”

옛 사람의 소심증을 비웃지 말자. 정말 소심한 사람은 따로 있다. 


언제부터인가 우리의 관념에는 역사란 자랑스럽고, 우리의 기상을 고양시키고,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는 것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알게 모르게 자리잡게 되었다. 


특히 70년대 이후로 진취적 기상과 뭐 그런 것을 좋아하게 되면서 역사를 뒤져 이런 기록들을 닥치는 대로 찾아내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창피한 이야기는 빼고, 사건의 일면만을 이야기하거나, 심하면 결론만을 강조할 뿐 사실과 배경설명을 빼 버리는 경우가 발생했다. 대마도 정벌이 바로 그런 예의 하나이다. 대마도 정벌을 했다는 서술은 많으나 그 진상을 적어 놓은 책은 거의 없다시피 하다.

그래도 그냥 정벌했다고만 자랑한 것은 양반이다. 

북한의 ?조선통사?는 한술 더 뜬다.


정벌군은 적의 발악적인 반항을 분쇄하고 상륙하였다. 이에 질겁한 적들은 험한 산속으로 도망쳤다. 원정군은 적들에게 속히 항복할 것을 여러 번 권고하였으나 끝내 응하지 않으므로 부득이 공격을 개시하여 섬 안의 각 포구들과 촌락들을 수색하여 포구의 시설들을 파괴하고, 해적들의 소굴로 되었던 2,007호를 소각하는 한편, 적선 124척을 불사르고 20척을 노획하였으며, 반항하는 적 154명을 살상 포로하였다. 심대한 타격을 받고 멸망에 다다른 쓰시마 영주는 마침내 앞으로는 조선에 공손히 복종하며 왜구들을 엄격히 단속하겠다고 맹세하면서 항복할 것을 애원하였다. 이리하여 쓰시마 원정군은 7월 3일날에 돌아왔다. (?조선통사?)


짧은 서술이지만 대단히 생각을 많이하고 다듬은 기록이다. 

발악적인 반항. 조선군의 분전을 자랑하고 승리의 쾌감을 주는 표현이다. 하긴 틀린 말도 아니다. 그러나 겨우 50여 명의 발악적인 저항이었다. ‘부득이한 공격’, ‘해적의 소굴이 된 2,007호’.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답게 지극히 엄밀하게 그리고 마지못해 무력을 사용한 것처럼 들린다. 하지만 옛날 전쟁이란 게 이렇게까지 인도적이지 않고, 군과 민간을 철저히 구분하지 않는다. 

그 자체가 불가능한 시대이기 때문이다. ‘항복을 애원…….’ 대마도주가 비슷한 서한을 보낸 것은 사실이지만 멸망에 다다라 항복을 애원했다는 것은 좀 심한 표현이다. 

그 편지는 상당히 정치 적이고 외교적인 편지였다. 물론 육전에서의 패전과 중국 이야기는 없다.

 

호연지기도 좋고, 정신보양도 좋지만 그것만이 역사의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이것이 지나치면 역사가 소재와 결론 중심으로만 흐르고, 사실 분석이 빠져 버린다. 역사공부를 왜 하는가? 따지고 보면 인간과 사회에 대한 이해와 분석 능력을 고양시키는 것이 제일 가는 목적이요 기능이다. 


어떤 훌륭한 명분을 사용한다고 해도 이 부분을 사장시켜 버리고, 결과만을 선전하는 플래카드 역할만 한다면 역사라는 이름으로 죄를 짓는 것이다.
그 역관의 말대로 그리고 태종의 생각대로 작은 패전이 무어  그리 큰일이겠는가? 더욱이 백병전을 잘하고 못하는 것은 민족의 총체적인 자존심을 걸고 비교해야 할 소재가 되지 못한다. 과학무기가 발달한 근대 이후에는 국력과 군사력이 일치할 수 있으나 전근대 사회에서는 각 민족이 처한 환경과 사회구조상의 특성에 따라 군사력의 성격과 강도는 달라진다.

 

몽고와 같은 유목민 사회는 중국과 한국에 비하면 대단히 후진적인 사회이다.


 하지만 말과 함께 살며 떠도는 생활특성과 부족사회가 주는 집단적인 단결성 때문에 야전에서는 어떤 문화권의 군대도 당할 수 없는 무적의 기병대가 된다.


전통적으로 조선군의 장점은 기마와 활이었다. 그래도 고려 때까지는 백병전도 꽤 잘했다. 백병전을 잘하려면 무술이 뒷받침되어야 하고, 그러려면 전문적이고 지속적인 훈련을 받은 무인계층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고려에서는 전문 군인층이 있고, 향리와 같은 사회의 중간지배층이 상당수 무(武)를 업으로 했다. 군대는 이런 중간 무사층을 기간으로 사적․지역적 연고에 따라 조직되었다. 또 사원이 자기 영지를 가지고 특권적인 권력을 누림에 따라 중국 소림사 승려와 같은 전문적인 무인 승려를 많이 양성했다. 그러나 이 체제는 백병전에 장점이 있는 반면, 향촌사회의 지배층들이 거칠고, 토호적이 되며, 국가체제가 지방분권적이 되고, 무인정권의 성립에서 보듯이 쿠데타와 사회혼란이 자주 발생하는 약점이 있는 것이다.

 

고려의 경험을 바탕으로 조선에서는 국가에서 징병하는 일반 농민군의 비중을 높였다. 


당연히 병사의 개별 전투력이 떨어졌고, 이들의 주무기는 창검이 아닌 활이 되었다. 총이 전쟁의 역사를 바꾼 것은 군인이 되는 시간을 3주로 줄였기 때문이다. 아직 총이 없던 시절이지만 우리의 군략가들은 활의 기능에 주목해서 활에 의존하는 부병제를 창출해 냈다.


그러나 총과 달라서 활만으로는 백병전 위주의 전쟁을 사격전으로 바꿀 수가 없었다. 이렇게 되자 수비에는 강하지만 평지전투와 공격에는 영 전력이 신통치 않았다. 군관, 한량 들과 같은 전문무사들이 있기는 했지만 역시 기마와 활이 장기였다. 백병전에서는 기병대가 더 효과적이지 않느냐고 말할 수도 있으나 기병대로 행하는 백병전은 한계도 많다. 아무래도 이들은 수가 제한되고, 엉성한 군대에는 강하지만 조직적인 군대나 공성전, 험한 지형에서는 위력이 제한되었던 것이다.


정말 창피한 것은 이런 작은 일에 민족적 자존심을 걸고, 대의를 손상시키는 소심함이다.


대마도 정벌은 사실 작지 않은 의의가 있다.

 하지만 그것이 드디어 복수를 했다거나 우리 역사에서 손꼽을 수 있는 정복전쟁의 하나라는 그런 것이 아니다.


내우외환에 시달리던 14세기의 양상은 태조편에서 조금 설명을 했다.


 그 시대가 오늘과 멀고, 사료가 많지 않아 그렇지 차분히 생각과 상상을 더해서 보면 얼마나 참혹하고 한심한 시대였는가 말이다.


이 시대의 사회상을 그려볼 때마다 다른 부분은 몰라도 이성계를 찾아 길을 떠나는 정도전의 분노만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그러한 분노는 당시에 정도전만이 품었던 것은 아니다.


이름도 남기지 못한 수많은 사람들이 이 허망하다시피 한 현실에 분노하고 고민했다.


이 전쟁의 참된 의미는 해적떼의 공격에 나라의 주요 도시가 떨어지고, 수도가 위협받을 정도로 엉망이 되었던 국가가 이제 완전히 건강을 회복하였음을 증명했다는 점에 있다. 


그리고 이 공로는 고려사회의 현실을 두고, 고민하고 행동했던 개혁파 사류 모두에게 돌려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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