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시적에 프로야구 출범과 더불어 OB 베어스 어린이 회원이 되었을 때 이야기이다.
우리 어머님이 나에게 하신 말씀이 기억난다.
' 야 야구를 보면 밥이 나오냐? 떡이 나오냐?'
공부 안 하고 매일 야구장에 가고 야구 프로만 보던 나에게 하신 말이다.
그러나
실제로 야구에 관심을 가지면서 떡이 나왔다.
당시 우리 집에는 세로로 글자가 나오는 조선 일보를 보고 있었는 데 신문이 아침에 배달되면 ( 지금도 그렇지만 ) 내가 제일 먼저 보는 면은 스포츠 면이었는데 그 스포츠 면에는 어제 벌어진 프로야구 경기들을 다시 토해 내며 재 구성 되어있었는 데 안타깝게도 선수들 이름이 모두 한문으로 나왔다.
한문을 읽지 못하면 도무지 이해가 안 되었다. ( 주인공 없이 어떻게 이해가 가겠는가?)
金宇烈, 尹東均, 朴哲淳
이거 읽으려고 나 한문 공부 했다.
三星, 靑龍, 三美 같이 구단 로고나 유니폼에 한문으로 되었는 것도 마찬가지
읽고 나니 쓰고 싶고 한 번으로는 부족하여 여러번 쓰고 그래서 다 외웠다.
지금도 주위 친구들 보다 한문을 많이 아는 것은 그 때 내가 다른 어린이 보다 한문 공부에 대해 출발이 빨라서 라고 믿고 있다.( 라고 쓰고 실제로는 믿고 싶다 )
영어도 마찬가지
homerun, catcher, pitcher, error, base
기타 등등
솔직히 영어의 영자도 몰랐던 시골 국민 학생이 알파벳을 배우게 된 것은 모두 야구 덕분이다.
이 정도면 야구에 투자한 시간이 낭비라고만 할 수 있는가?
국가 입장에서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베이브 루스가 선수 생활 내내 수많은 고아원과 병원을 찾아다니며 어린이에게 희망을 주고 이는 이후 메이저 리그의 전통이 되었다. 정책 입안자들에게 어린이 보호 정책을 자극하는 것에 이것 만한 것이 있을까?
또 인종 차별 정책에서 메이저 리그는 커다란 족적을 남겼는데
메이저 리그의 재키 로빈슨이 없었더라면 인종 차별의 벽이 허물어지는 했겠지만 시기는 아마 적어도 10년은 늦어졌을 것이다.
테드 윌리엄스가 명예의 전당 연설에서 사철 페이지나 조지 깁슨을 명예의 전당에 받아드리자고 안했더라면 그 후 흑인 선수 혹은 남미 선수들의 메이저 리그 진출은 더 늦어졌을 것이고 인종 차별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의 변화는 더 힘들었을 것이다.
그것 이외에도 유명한 야구 선수들이 돈을 모으고 그 돈으로 병원을 짓는다던지 암 환자를 돕는 다던지 하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 뭐 개인적로는 우리나라도 그런 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지만 )
결론은 야구를 보면 개인에게나 나라에 떡이 나온다는 거
서론이 길었는 데 오늘의 주제 조 디마지오에 대해서 이야기 해 보자
테드 : .344(타율) .482(출루율) .634(장타율) / 2292경기2654안타521홈런1839타점
조 : .325(타율) .398 (출루율) .579(장타율) / 1736경기2214안타361홈런1537타점
--> 테드 윌리엄스와 함께
확실히 비교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윌리엄스도 지적했듯이 조 디마지오는 성적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그 무언가가 있다.
Seven of the American League's 1937 All-Star players, from left to right Lou Gehrig, Joe Cronin, Bill Dickey, Joe DiMaggio, Charlie Gehringer, Jimmie Foxx, and Hank Greenberg. All seven would eventually be elected to the Hall of Fame. 왼쪽에서 첫 번 째가 요즘은 루게릭 병으로 더 유명한 루 게릭 4 번 째가 디 마지오, 7명 모두 명예의 전당에 들어감
아직 윌리엄스는 데뷰 이전
내가 디마지오를 알게 된 것은 우습게도 사이먼과 가펑클을 통해서였다.
Sitting on a sofa on a Sunday afternoon.
Going to the candidate's debate.
Laugh about it, shout about it
When you've got to choose
Every way you look at this you lose.
Where have you gone, Joe DiMaggio,
Our nation turns it's lonely eyes to you.
What's that you say, Mrs. Robinson.
Jotting Joe has left and gone away,
Hey hey hey
Sound of silence 만큼이나 난해한 가사의 Mrs Robinson.
원래 뜬 금 없는 가사들이긴 하지만 여기에 튀어나오는 사람 이름 바로
Joe Dimaggio
혹시 여러분들은 유행가 가사에서 야구 선수 아니 운동 선수들의 이름을 발견한 적이 있는가?
( 실제로 폴 사이먼은 디마지오가 죽었을 때 양키스 스타디움에서 거행된 추모 행사에서 ‘Mrs Robinson’을 불렀다 )
심지어는 노벨 문학상 수상 작품인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 에서도 디마지오의 이름을 발견할 수 있다.
한번은 마놀린이 그에게 클리브랜드 인디언스 팀이 승산 있다고 말하자 산티아고는 곧바로 " 얘야 양키스 팀을 믿어라. 그 훌륭한 디마지오 선수가 있잖니?" 라고 말한다.
청새치와 사투하면서 산티아고는 "발뒤꿈치에 뼈돌기가 박혀 있으면서도 그것을 참고 최후까지 멋지게 승부를 겨루는 저 훌륭한 디마지오 못지 않은 사람이 되어야지" 라고 생각한다
그럼 디마지오의 매력은 무엇일까?
조 디마지오는 1914년 캘리포니아의 마르티네즈에서 이탈리아 이민자인 Giuseppe의 9번 째 중 8번째로 태어났다 ( 확실히는 잘 모르겠으나 이탈리아계는 인공 유산을 안 하는 것이 전통 인 듯 같다. 영화 대부에서도 마이클 (알카치노 분 ) 이 자기 부인이 유산을 했다고 때리는 장면이 있다. 9명이라니 참 좋겠다 )
그의 아버지는 어부였고 자기 자식들도 어부가 되기를 바랐으나 그의 마음을 앗아간 것은 야구였다.
마이너 리그 격인 Pacific Coast League (PCL) 에서 1932년 데뷰한 디마지오는 1933년 사건을 일으킨다.
바로 61게임 연속 안타를 기록한 것이다. 그는 이후 인터뷰에서 연속 안타 기록에서 실패 한 후 야구에 대해서 깊게 이해 했으며 매일 먹고 마시고 자는 것 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라고 말했다
(Baseball didn't really get into my blood until I knocked off that hitting streak. Getting a daily hit became more important to me than eating, drinking or sleeping)
그러나 1934년 메이저 리그 입성을 앞두고 그는 택시에서 내리다가 무릎을 크게 다쳤다. 그의 선수 생활이 끝났다고 사람들은 생각했으며 실제로 10만 달러 거론되었던 그의 계약금은 크게 떨어졌고 결국 1936년, 모든 팀이 다 떨어져 나가고 유일하게 계약하기를 희망했던 뉴욕 양키스에서 그는 메이저 리그 데뷰를 하게 된다.
1936년 5월 3일 데뷰 당시 그의 뒷 타석에는 양키스의 전설 그 유명한 루게릭이 있었다
그의 데뷰 시즌은 타율 .323, 29 홈런, 125 타점을 기록했고 아메리칸 리그 신인 최고 기록을 세우게 되고 양키스는 4년 만에 월드 시리즈를 차지하게 된다. 월드시리즈를 4연패 하게 되고 그 후 그의 커리어 13년 동안 10번 월드 시리즈에 나가서 9번 우승하게 된다.
사람들이 보기에는 당연히 그는 양키스의 복덩어리로 여겨졌을 것이다.
데뷰 2년차 징크스를 무색하게 디마지오는 홈런 46개로 홈런1위 167 타점으로 타점 2위에 오르며 양키스의 새로운 희망으로 떠오른다. 46 홈런은 약쟁이 알렉스 로드리게스가 2005년 기록을 깰 때 까지 양키스 우타자 신기록이었다.
38년 .324 32 홈런 140 타점으로 변함 없는 활약 후
1939년 .381 타율 30 홈런 126 타점의 기록으로 첫 MVP를 차지한다.
( 이해는 테드 윌리엄스가 데뷰한 해이기도 하다. 참고로 윌리엄스의 기록은 .327, 31 홈런, 145 타점 )
9 월 초 까지만 해도 4할 타율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갑자기 시력에 이상이 생겼다고 한다. 그 후 우타자가 기록한 가장 높은 타율은 2000년 보스턴의 노마 가르시아파라가 기록한 .372 이다.
.352 의 타율과 31 홈런을 기록한 1940년을 보내고 그리고 1941년을 맞이하게 된다.
연속 안타
테드 윌리엄스 편에서도 말했지만 1941년은 메이저 리그 역사에서 매우 기념비 적인 기록이 작성된 해이다. 바로 테드 윌리엄스의 4할 타율과 함께 디마지오의 56게임 연속 안타 기록이 세워졌다.
여러 우여곡절도 많았으나 가장 극적이었던 것은 38 경기 째
양키스가 앞선 8회말 1사 1루에서 타석에 등장한 헨리치는 본인이 병살타를 칠 것을 두려워하여 감독에게 번트를 하겠다고 감독에게 허락을 받았고 그 후 디마지오는 안타를 작성한다.
상대 투수의 회피 성 볼을 억지로 때려 안타를 만든 적도 있으며 동생 돔 디마지오의 멋진 다이빙 캐치로 기록 중단 위험도 있었다. 이 플레이로 “ 디마지오가 엄마를 고소해야 겠군” 이라는 명언이 나왔다.
테드 윌리엄스가 감독의 휴식 권유를 뿌리치고 정정 당당한 4할을 만들어낸 것 처럼 조 디마지오도 56 경기에서 단 한 번의 기습 번트 시도도 하지 않았다.
( 김형준 저 메이저 리그의 레전드 에서 )
57 번째 경기에서 9회 초 그의 땅볼 성 공이 클리블랜드의 3루수 켄 켈트너의 글러브에 들어가며 어렵게 송구한 끝에 간발의 차이로 아웃되자 57경기 연속안타행진은 볼 수가 없었고 그 후 17 경기에서 다시 연속 안타 기록을 작성했다.
디마지오는 연속 게임을 하는 동안 .408의 타율과 15 홈런 55점의 타점을 기록한다. 연속 안타의 기록이 깨진 다음에도 디마지오는 17게임을 다시 연속 안타 기록을 작성한다. 74게임에서 73 안타 역시 기록이다.
디마지오의 연속 안타 기록은 다른 어떤 기록과도 비교할 수 없이 빼어난 기록이며 또한 깨지기 어려운 기록으로 사실 통계학적으로도 거의 불가능하다.
노벨 물리학상을 받고 또 야구 분석가인 Edward Mills Purcell에 따르면 미국 프로야구를 1980년대 후반까지 분석한 결과 메이저 리그 탄생 이후 통산 타율이 3할 5푼이 넘는 타자가 52명 정도 있어도 50게임 연속 안타 기록이 작성될 확률은 겨우 50%가 넘을 수 있다고 말하였다 ( 실제로 통산 타율이 3할 5푼이 넘는 타자는 타이콥, 로저스 혼스비 등 3명, 그러니까 어려운 기록이다 이렇게 말하면 되지 참 어렵게 말한다 )
또 Purcell의 하버드 대학 동료인Stephen Jay Gould는 디마지오의 56게임 연속 안타 기록은 미국 스포츠계에서 작성된 기록 중 가장 달성되기 어려운 기록이라고 말했다.
실제로1941년 이후 디마지오의 연속 안타에 가장 근접한 기록의 선수는 통산 4256개의 안타 기록을 가지고 있는 피트 로즈로 1978년 44경기 연속 안타를 기록하였다 ( 우리나라는 박종호의 39 게임 연속 안타 )
군대
1942년 시즌이 끝나고 조 디마지오도 군에 입대하였다. 입영 대상자는 아니였지만 ( 이탈리아 이민계였기 때문에 당시 이탈리아 사람들은 경계의 대상이었다고 한다.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 당시는 미국 시민권자가 아니였다 ) 메이져 리그 유명 선수들의 자진 입대 분위기는 피할 수 없었다.
Physical education instructor 로 군대에 있던 그는 한 달에 21달러의 월급을 제외하고는 정말 편하게 군 생활을 하였다. 주로 군대에 있던 메이져 리거들과 마이너 리거들과 야구 경기를 하고 위문을 다녔고 그의 상급자는 전쟁 전 유명한 그에게 특혜를 베풀었다.
하와이에서는 다른 선수들과 같이 선탠을 하고 마시고 놀면서 결국 10파운드 이상 몸무게가 늘어나고 이런 라이프 스타일에 안 되겠다 싶어 실제 전투에 참여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거부 당하였다.
결국 1945년 위궤양으로 전역을 하게 된다. ( 동체 착륙을 하고 죽을 뻔 하다가 폐렴에 걸려 전역한 윌리엄스와 비교되는 것은 사실 )
1946년 전역 후 연습 부족으로 .290으로 처음으로 3할 타율을 넘지 못하였으나 47년 포수 요기 베라와 함께 팀을 이끌며 월드 시리즈 우승을 이끌며 세번째 MVP를 차지한다.
이 때 MVP 선정은 문제가 많았는 데 디마지오는 .315 20홈런 97 타점을 기록했는데 윌리엄스는 .343 홈런 32 타점 114 을 기록하였다. 월드 시리즈 우승 프리미엄 이외에도 기자들은 찬바람 쌩쌩 부는 윌리엄스 보다는 온화하고 부드러운 디마지오를 좋아하였다.
48년 시즌 내내 발꿈치 부상에 시달리고도 ( 이 사건은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에서 노인이 청새치와 사투를 벌일 때 ‘ 디마지오는 발꿈치 부상을 이겨내고 좋은 기록을 생산했는 데’ 하는 회고 장면에서 인용된다 ) 39홈런과 155타점으로 리그 홈런왕과 타점왕을 차지, 4번째 개인 MVP에 도전장을 내밀었지만, 클리블랜드의 감독겸 선수로 월드시리즈 우승을 시킨 루 부드로에게 압도적인 표가 몰려 최초의 4회 MVP수상은 실패로 돌아갔다.
시즌 후에는 프로야구 최초로 10만 달러의 연봉을 갱신했다.
49년 발꿈치 부상으로 시즌 초반 65 경기를 결장하고도 타율은 .346을 기록하였으나 홈런은 14개에 그쳐 이미지를 구겼으나 50년 홈런 32개 .301 122 타점으로 명예를 회복하였다.
그 후 51년 .263 12 홈런 71 타점으로 기록이 급락하자 조 디마지오는 구단의 10만 달러 재 계약을 뿌리친다.
그는 인터뷰에서 ‘ 나는 지금 온몸이 다 아프며 이로 인해 경기를 하는 데 어려움을 느낀다. 야구가 재미가 없다면 그것은 더 이상 경기가 아니고 그러므로 나는 ( 다음 시즌에 다시 억지로 경기를 하더라도 ) 마지막 경기를 한 것이다 ‘ 라는 애매모호한 말을 남기며 중견수 자리를 미키 맨틀에게 물려 주며 은퇴한다.
I was full of aches and pains and it had become a chore for me to play. When baseball is no longer fun, it's no longer a game, and so, I've played my last game.
디마지오는 양키스 홈 구장 때문에 몹시 손해를 본 타자 중 하나인데 루스가 지은 집 ‘ the house that Ruth bulilt ‘ 은 완전 좌타자에게 유리한 구장이었다. 특히 좌중간 펜스는 당시 139m로 현재의 ( 지금은 옮겼지만 ) 116 m 보다 훨씬 멀었다. ( 로드리게스의 기록도 음 )
물론 베이브 루스 자신도 밀어치는 경우 손해를 막심하게 보았다.
암튼 디마지오는 통산 361개의 홈런 중 213개 (59%)를 원정 경기에서 기록하였고 맨틀 처럼 양 타석에 서는 선수들도 양키스 구장에서는 주로 왼쪽 타석에 섰다고. ( 맨틀은 실제로는 우측이 더 강했다고 한다 )
조 디마지오는 삼진당 홈런 수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데 총 361 홈런에 삼진 369개를 기록하여 최고의 선구안을 자랑하였다. ( 0.98 윌리엄스 521/709 0.73, 본즈 762/1539 0.49 )
( 이런 그도 냉장고에서 우유를 못 찾아서 먼로에게 쿠사리를 먹었다고 전해진다. )
그는 대 공황과 세계 제 2차 대전으로 심신이 지쳐있는 미국인들에게 커다란 위안을 주었으며 ‘ 오늘도 조 디마지오는 안타를 치겠죠 ‘ 가 그들의 인사가 되었다.
디마지오는 데뷰 후 연속으로 13년 연속 올스타에 뽑혔으며 데뷰부터 은퇴 할 때 까지 올스타전을 거르지 않은 선수는 그 뿐이다
그리고 그 후 그는 사랑을 시작하였다.
결혼
디마지오는 Dorothy Anorld 라는 여 배우와 1941년 27세의 나이로 결혼을 한다. 그 후 아들을 하나 낳고 30세에 이혼을 한다. ( 결혼한 두 여자가 모두 배우라는 거 )
그 후 39세가 되던 해 그는 세기의 여배우 마를린 먼로를 만난다.
먼로는 16세 때 첫 결혼을 하고 5년 만에 이혼하였으며 그 후 31세 많은 유부남을 만나기도 하였다. 디마지오는 2번 째 먼로는 3번째인 결혼이었다.
먼로는 처음에 디마지오를 만나는 것을 내켜하지 않았는 데 그가 틀에 박혀있고 ( sterotype)이고 거만 할 것 같은 느낌이어서 그랬다고 한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도 자유 분방한 먼로와 미국적 가치를 중요시 할 것 같은 그들이 잘 어울릴 것 같지 않는다.
역시 그 커플은 이런 저런 이유로 삐걱거리기 시작했고 결국 결혼 274일 만에 이혼을 했다.
( 7년 만의 외출 이라는 영화에서 지하철 바람에 치마가 흩날리는 장면을 찍고 와서 몹시 싸웠고 그 후 사이가 더 나빠졌다고 한다.
디마지오의 전기 작가 Cramer 에 의하면 그들의 결혼 생활은 폭력으로 얼룩져 있다고 표현했는 데
그 중 한 사건이 바로 이 사건인데 forceful incidence 라고 표현을 했다.
확실한 것은 그 로비에서 'yelling battle' 을 했다고 하는 데 두들겨 팼다 라는 표현을 저렇게 완곡하게 쓴 게 아닌 가 싶기도 하다 )
--> 바로 이 장면
마를린 먼로의 일상에 그가 다시 나타난 것은 1961년 그녀의 2번째 결혼인 아서 밀러와의 결혼이 끝났을 때 였다. 그 후 친구 처럼 지내다가 ( 라고 주장을 함 ) 결국 1962년에 8월 1일 마를린 먼로에게 다시 재청혼을 한다.
그러나 그녀는 4 일 뒤 8월 5일 죽은 채로 발견된다. 디마지오의 아들인 Joe Jr는 그녀가 죽은 바로 그날 전화를 했었고 그녀는 괜찮아 보였다고 이야기 했는 데 결국 이 사건은 마를린 먼로의 자살로 결론 내려졌다. ( 이런 사정 때문에 음모론이 횡횡했다 )
조 디마지오는 마를린 먼로의 장례를 직접 주관하였고 그 후 20년 동안이나 그녀의 묘지에 빨간 장미를 일주일에 3번씩 바쳤다. 그는 먼로의 사생활이나 그 들의 관계에 대해서 일체 말하지 않았고 그 후 다시는 결혼하지 않았다.
참고로 케네디는 물론 바람둥이 클린턴도 싫어했는 데 95년 칼 립켄 주니어의 연속 경기를 축하하러 온 클린턴의 악수도 거절했다고
(그러나 사실 먼로와 헤어지고 나서 그 후 먼로가 죽기 전까지는 미스 아메리카를 비롯한 여러 여자와 염문을 뿌린 것 또한 사실임 )
죽음
Heavy smoker 였던 디마지오는 결국 폐암으로 사망한다 ( 담배를 끊자!!! )
유명한 야구 선수 로서 마지막 말은 야구에 관해서 할 것 같았지만 ( 그렇게 기대를 ) 의외로 유언은 ‘
이제 그녀 곁에 갈 수 있겠군 ‘
이었다고. 알흠다운 사랑 이야기. 저승에서는 부디 둘이서 행복하기를 …
조 디마지오 사진을 검색하다 보니 야구 얘기 절반 마를린 먼로 얘기 절반이네요. 뭐 걍 그렇다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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