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정 활동 잘하고 있었고 방송 출현도 많이 하고 국민들에게 친숙하고 나름 어필하는 표창원 이철희 의원이 내년 총선을 불출마 선언을 했다. 특히나 표창원 의원은 2015년 당시 새정치민주연합 대표였던 문재인 대통령의 영입 인재 1호로 정치권에 발을 들인 분이라 더 안타깝다.
표 의원은 ‘오랜 고민과 가족회의 끝에 총선 불출마’를 결정했다고 전하며 ‘정치를 통해 정의를 실현하겠다는 다짐, 당리당략에 치우치지 않고 오직 정의만을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겠다는 초심이 흔들리고 위배된 것은 아닌가 고심하고 갈등하고 아파하며 보낸 불면의 밤이 많았다’ 고 했다.
예전에 우리 학교 교수님 –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스타 대학 병원 의사 선생님-이 총선에 나가시려고 준비 하신 적이 있다. 워낙 TV 에도 많이 나오시고 네임드 이셔서 출마만 하시면 당선은 어렵지 않을 거 같았던 분인데 선거 사무소도 만드시고 며칠 만에 포기 하셨다.
그 이유는 –TV 뉴스에도 나왔지만- 각종 이익 단체에서 와서 돈을 요구한다는 이유였었다. 정치가 이런 줄 몰랐다는 말씀도 하셨던 것 같다.
(정치가 타락한 것은 원래 알고 있었으나 이 정도까지 인 줄은 몰랐다 뭐 이런 뉘앙스 인 것 같았다)
솔직히 참 한심했다.
원래 정치가 그런 줄 몰랐다고? 저런 분이 국회의원이 되면 참 더 큰 문제가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다른 사람 선거 운동을 1주일만 해 보았어도 저렇지 않았을 것 같다. 원래 고고하신 분이어서 사람들이 모시기만 했지 큰 조직에서 다른 사람들을 배려하거나 조정하거나 한 적이 없으셨던 것 같다.
현재 우리 사회의 모습을 살펴보면 어떤 정책이 제시되었을 때 그것의 기능, 역기능을 따지기보다 그거을 주장한 진영이 좌냐 우냐? 부자 쪽이냐 빈자 쪽이냐? 내편이냐 네편이냐? 하는 것부터 따지고 든다. 우리 현실을 더 나은 쪽으로 발전시켜줄, 그러면서도 가장 부작용이 적을 만한 정책인지 고민하기 보다는 그 정책을 미는 세력이 누구인지를 먼저 따지는 이런 한심한 모습은 비단 어제, 오늘 발견되는 것이 아니다.
최근 국민들에게 압도적 지지를 받고 있는 ‘공수처 법’ 만 살펴 보아도 국민 대다수가 원하고 있고 현 대통령은 공수처 법 설치가 아예 대선 공약이었으며 대다수의 여당 국회 의원도 다 원하고 있다. 그러나 왠일인지 일은 지지 부진하다.
‘검찰 개혁’ 역시 마찬가지 이다.
세상은 언제나 가진자의 편이고 있는 사람은 양보 할 줄 모른다. 권력까지 쥔 인간들은 더 이기적이다. 세상이 이렇게 부조리해도 제대로 된 개혁안 하나 내놓을 줄 모른다. 아니 개혁안은 있는 데, 그 작은 양보 하나 하는 데도 쩔쩔매며 시간을 끈다. 이렇게 우리는 이런 부조리가 가진 사람들의 양보하지 않는 마음 때문에 개혁이 이루어 지지 않는 다고 믿는다.
사실 이렇게 ‘개혁’을 허울 좋은 명분으로 내세우며 실은 자신에게 유리한 정책만을 추구하거나 이상에 사로잡혀 현실을 보지 못한 이런 무리들은 역사 속에서도 여러 번 포착되었다.
예전 조선 시대에 김 육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율곡이나 퇴계 처럼 잘 알려진 분은 아니나 이론 뿐이었던 대동법을 추진하여 공납의 폐단을 시정하고 백성을 도탄에서 구한 인물로 평가된다.
장원 급제한 분으로 영의정 까지 올랐는 데 사실 조선시대를 통틀어서 장원 급제 하고 영의정까지 오른 인물은 의외로 최항과 노사신 그리고 김육 밖에 없다 (장원을 하면 처음부터 급이- 종6품으로 바로 발령 (현감 그러니까 사또) 달라져서 출세 가도를 달릴 수 있다.)
대동법은 16세기 율곡 이이에게서 시작하여 유성룡, 정철, 이원익, 한백겸, 윤선도, 조익 등의 지지를 받았다. 이런 조선시대의 최고 천재라고 생각되어지는 혹은 실제 권력의 중심에 있었던 쟁쟁한 인물들이 주장했고 조선의 왕들도 여러 이유로 대동법을 시도하였으나 100년 이상이나 논쟁만 벌이고 시행이 되지 않다가 17-18세기에야 겨우 시행되었다.
무슨 엄청난 혁명 입법도 아니고 세금을 시장에서 유통되는 쌀로 걷겠다는 그 단순한 법을 실제로 조선 시대의 수많은 명망가들이 주장했고 실제로 왜란과 호란으로 인해 국가의 재정이 파탄 지경에 이르러 엄청 필요한 시점이었고 공납의 폐단으로 인해 엄청 시달리던 수많은 국민들 조차 압도적 지지를 받았던 대동법이 무려 150년이나 끌었던 것이다.
왜 그러했을까?
우리는 여기서 올바른 제도는 사람들이 알아서 올바르게 지지해 줄 것이라는 믿음을 버려야 한다.
(비슷한 말로 ‘좋은 의도가 항상 좋은 결과로 연결되지는 않는다’ 라는 이야기도 있다)
어떤 제도도 완벽할 수 없고 그 제도가 실행되기 전에는 어떤 부작용이 생길 수 알 수가 없다. 특히 대동법처럼 농본주의 사회를 상업주의 사회로 변화 시킬 수 있는 제도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불안해 한다.
더군다나 일부 사람들은 대동법으로 큰 피해를 볼 수가 있다. 공무원들의 무사안일 주의를 비판하지만 사실 내가 공무원이어도 변화를 시도했다가 큰 피해를 보거나 욕을 먹기 보다는 꾸역꾸역 자리를 지키면서 확실하게 살아가는 것이 좋을 수도 있다 (이것을 전문 용어로 ‘복지부동’ 이라고 한다)
실제로 역사가들은 대동법을 실시하게 되면 양반과 가진 자들도 세금을 공평하게 내야 되기 때문에 지금까지 관행대로 했었던 경작자에게 세금을 전가 시키는 일을 못하게 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악착같이 대동법을 반대했었다고 주장한다.
이 탐욕스럽고 조금도 양보할 줄 모르는 이기적이고 무책임한 지배층 혹은 부자들 때문에 이 좋은 제도가 100년 넘게 표류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참 화가 난다. 이러한 현실에 자괴감이 들 수 밖에 없다.
사회에서 벌어지는 모든 부조리를 없는 자에 대한 가진 자의 횡포로 해석하는 방식은, 언제나 일정 부분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은 사회 문제를 아주 단순하고 편하게 이해하는 방법이다. 물론 이해하기 쉽고 단순하니까 대중을 선동하기도 쉽다. 그러나 이런 시각으로는 진실을 이해할 수 없고, 현실사회의 해법도 찾을 수가 없다.
반년 전쯤 카카오 카풀 택시와 택시 운전사들이 맹렬히 대립했던 것을 기억하는가?
대부분의 여론은 택시 운전사들을 반대하는 것이었는 데 사실 택시 운전사 분들은 몹시 억울 할 수도 있었을 것 같다. 실제로 분신하시는 분들도 있었고 생계에 관한 것이라 여론만으로 몰아부치기는 어려웠다.
대동법도 마찬가지 였다. 비록 국민 대다수가 그리고 조정에서도 몹시 원하고 있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대동법에 대해 짧게 이야기 하기는 어렵지만 도에 배정된 공물은 각 군현에 배정된다. 그런데 균등한 분배가 불가능하다. 어떤 군현은 호랑이 가죽을 공납해야 되는 데 실제로 사치품인 호피의 가격은 필수품인 쌀 가격과는 달리 유동성이 심할 수 밖에 없다.
더구나 조선은 시장이 없어서 공물의 값을 매길 방법이 없다. 결국 대동법이 시행이 되면 이런 기준이 모호해 지고 서로 그 기준으로 싸우게 될 수 밖에 없다.
또 조선시대는 운송수단이 열악했기 때문에 강 옆에 사는 사람들과 산 꼭대기 사는 사람들의 공납 시 운송비를 포함하는 쌀의 가치가 같을 수가 없다
결국 대동법 전면적 시행 시에 그 불안감 때문에 각 군현의 수령들은 불안해 할 수 밖에 없다.
불평등과 불합리만큼 사람들의 감정을 자극하는 요인은 없다. 군현마다 대동법으로 인해 공물 배정이 불공정하다고 아우성이 나고 현감은 난감할 수 밖에 없었다.
이 때 당시 대동법 시행의 담당자였던 김 육의 활약이 돋보이게 된다.
김육은 대동법의 진정한 의미와 그 배경에 있는 공물문제의 근본적인 원인을 파악했고 그 당시 사회 구조가 농본사회에서 상업사회로 넘어가야 된다는 이론적 근거를 잘 이해했다. 대동법이 단지 공납 제도만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그로 인해 변화하게 될 유통 경제, 상업 발달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김육은 국왕을 설득하고, 반대파와도 싸우고 일선의 수령을 설득하였다. 정 안되면 선비들의 비난을 각오하고서라도 교묘하게 관직에서 반대파들을 퇴출 시키면서 대동법을 밀어부쳤다.
그는 감사와 수령, 젊은 관료들을 만나 끊임없이 그들을 설득하고 동의를 얻어내고, 책임지기 싫어하는 관료들이 대동법이라는 새로운 과제에 도전하도록 용기를 복돋았다. 그의 노력이 빛을 보았는 지, 전에는 주민들이 대동법을 지지해도 반대부터 하고 보던 수령들이 김육의 표현을 따르면 ‘무언가 시도해 보고 싶어 하는 적극적인 젊은 수령들’ 로 바뀌었다.
김육은 진정으로 집요하고 끈질긴 행정가였다. 임종의 순간까지 대동법을 위해 노력했고, 마침내 그 해에 대동법이 충청도와 호남에서 시행되었다.
대동법이 오랫동안 논의되면서 시행되지 않았던 데는 정책 집행자들의 추진력 부족에도 책임이 있다. 많은 사람들이 대동법을 주장하고 노력했지만, 어떤 이는 상소나 자기 표명으로 그 노력을 끊냈다. 어떤 이는 시행을 위해 꽤 노력을 했지만, 자신의 정치생명을 걸 정도로 절박하고 집요하게 추진하지 않았다.
개혁이 실패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흔하고 가장 바람직하지 못한 방법이 눈에 보이는 현상만을 해결하려고 ‘덤비는’ 경우이다. 그럼에도 이 방법이 남용되는 이유는 정치적이고 선동적인 효과가 탁월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벽이 갈라지면 갈라진 벽을 본다. 전문가가 아닌 이상 지반이나 땅 밑의 물줄기 같은 문제의 근원, 건물의 역학적이고 구조적인 문제는 파악하지 못한다. 인간은 개개인의 뇌 구조만 해도 웬만한 건물보다 복잡하고 정교한 체제로 되어 있다. 그런 인간이 수백, 수천만이 모이고, 서로 복잡한 이해관계로 얽힌 곳이 사회이자 국가다.
지식인이라고 해도 이 구조를 제대로 이해하거나, 자신이 아는 지식은 이 구조의 극히 일부라고 자인할 만큼 겸손한 사람은 극히 드물다. 그래서 논쟁을 하면 단순명쾌한 현상론자들을 이기기 힘들고, 한번 포퓰리즘이 득세하면 포퓰리즘 스스로 모순에 빠져 문제를 일으키고 파멸하기 전까지는 그 환각에서 헤어 나오기 쉽지 않다.
우리는 역사 속의 인물을 볼 때 그가 주장한 정책, 주의에만 과도하게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진짜 존귀한 인물은 국가의 백년대계를 자신의 일처럼 절박하게 추진하는 인물이다. 그런 점에서 김육은 더 높은 평가와 존경을 받아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있다. 조선시대를 통틀어 이런 추진력을 보인 인물은 흔치 않았다.
나름 엄청난 기대를 하였던 이철희 표창원 의원들에게 좀 바란다.
정치는 옳은 생각만으로 되는 것은 아니다. 앞에서도 잠깐 서술했지만 많은 경우사람들은 정책의 내용 보다는 누가 주장했냐?에 따라 지지할 수도 안 할 수도 있다. 바꿔 말하면 다른 당 사람들을 설득하고 이야기 하다 보면 좋은 결과가 나올 수 있다.
물론 정치에 쇼맨쉽 당연히 중요하다. 필요하면 울 수도 협박 할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본인이 옳다고 생각되는 정책을 자기 일 처럼 절박하게 추진하는 일이다.
카카오 카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전현희 의원이 얼마나 사람을 만났는 지 알았을 때 나는 그의 진정성과 실력을 인정하였다.
사람들은 만나지 않고 연구실에서 옳은 소리만 목청 높인 다면 아무 일도 할 수 없다.
많은 정치인들 그리고 행정가들이 꼭 알아 주었으면 좋겠고 아무튼 쉽게 안 지치셨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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