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이야기

명절 부활 프로젝트

다린이아빠 2017. 1. 29. 11:17

딴지일보의 김어준 총수의 글..


10년도 더 된 글이지만 아직도 유효하다.


우리는 왜 그리 가족들에게 기대를 하면서 또 상처를 받는 지...


읽어 보시라



이번 추석엔 선글라스를 샀다. 바이오, 세라믹, 원적외선 뭐 이따위 사발로 포장된 효도상품이나 수입산 갈비짝 대신. 

평생 써 본 적 없을 뿐더러 자긴 안마사 같을 거라며 손사래 치는 노친 둘을 다잡아 안경점 매대 앞에 밀어 놓자, 

입으로는 연신 "글쎄 안 한다니까"를 되뇌면서도 손으로는 이것저것 걸쳐보기 바쁘다. 


게다가 짐짓 차분한 어조로 라이방이 일본어인지 영어인지 아느냐며 남사스러움 극복용 페인트모션까지 구사한다.


귀엽다, 노인네들.


우리는 부모를 욕망을 가진 한 사람의 독립된 여자와 남자로 바라보지 못하는 사회다. 

그런 시각은 불경스럽거나 외람되다. 


부모는 사람이 아니라 부모다. 


부모와 자식이 인간 대 인간으로 연민하고 신뢰하는 대등한 동지적 연대는, 자식이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성립될 수 없다. 


이 전복 불가능한 절대위계 위에 가족이 구축된다. 그리고 그 질서에 따라 각자 자신의 고정배역만 연기한다.


이 질서를 교란하는 건 패륜이다. 패륜, 사람으로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를 지키지 않는 것. 본능이 아니라 도리를 지키지 않는 거다. 그러니까 생물학적으로 자연 결속된 생활결사체이기만 한 것으로 오인되는 가족은, 사실은 그렇게 사회적 역할극이다.
 




일본의 한국계 회사에 일하는 일본 여성에게 물었던 적이 있다. 연애 상대로 일본과 한국 남자 중 누가 나은지.


 주저 없는 즉답. 한국 남자. 더 남성적이고 더 낭만적이란다.


괜히 실속도 없이 흐뭇해져 돌아서는 뒤통수에 질문 몇 개가 던져졌다. 


근데 서른 다 된 유학생이 방학 때 자기랑 외국여행 가는 걸 왜 부모한테 허락받느냐. 


그 남자가 취직해 버는 월급을 왜 부모에게 다 주고 타서 쓰느냐. 한국은 가족 사랑이 그만큼 깊은 거냐. 가족 사랑. 쩝.


스위스 IMD의 국가경쟁력 평가 항목에 반드시 포함되어야 한다고 홀로 수 년 째 주장하며, 세계 50여 개국의 남녀를 여행 경험을 바탕으로 비교해 주변지인들에게만 발표해 온 본인의 야매 세계남녀경쟁력순위표에 의하면,


한국 처자들의 외모 교육 생활력 등등을 포괄한 종합경쟁력은 헝가리, 이집트와 경합하며 세계 3위권..


이다. 본 사설 집계가 얼마나 객관적이냐. 그게 글쎄 하여간 엄청나게 객관적이다. LPGA 보라.


반면 한국 남자들 순위는. 50위. 꼴찌다. 한국 남자들, 아시아에서 가장 체격 좋고 교육수준도 세계 톱클래스다. 


근데 한 항목이 다 까먹는다. 독립 지수. 우리 남자들, 평생 누군가의 아들이다. 명절 보라.
 




우리 가족 시스템은 언젠가부터 독립된 한 사람의 어른을 육성하는 데 실패하고 있다.


어른, 누군가 대신해 주지 않는 삶의 리스크를 스스로 테이킹하고 그 결과도 온전히 감당하는 자. 


두렵지만 그렇게 삶의 불확실성과 스스로 맞서겠다 결의하는 어느 순간, 아이는 어른이 된다.


우리 가족 시스템은 그 순간을 평생 맞지 못하도록 한다. 아이의 리스크는 할 수 있는 한 부모가 대신 헷지한다. 


그 과정서 부모는 아이를 자신의 종속 인격체·욕망 대리자 삼고, 그 과잉의 안락에 자신의 월급 뿐 아니라 삶 자체를 위탁한 아이는 혹여 경제적 곤란에 처하면 그 난관을 아버지의 죽음으로, 그 유산으로 해결하려 한다. 


이 지독한 성장지체를 우린 효와 사랑이라 불러왔다.


최소한의 사회안전망조차 작동하지 않았던 탓도 크다. 대한민국의 20세기에는, 개인이 스스로를 보호할 수 없을 경우, 

국가복지도 지역사회도 아닌, 오로지 가족이 마지노선이었다. 


가족결속이 절박할 수밖에.


가족 구성원간 과잉감정은 이 자폐적 가족주의의 필연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기대하고 요구하며 상처받고 실망한다. 서로가 서로에게 정도 이상의 감정비용을 지불하며 서로가 서로에게 바가지를 쓰고 있다고 여긴다. 모두가 모두에게 그렇게 채무관계로 결박되어 있다.
 




명절은 이제 씨족 행사도, 집단 귀향도 아니다. 


평소 마땅한 분량의 가족의무를 수행하지 못한 자들이 그 죄의식을 탕감 받으러 가는 날.


 그러니 길이 막혀 다행이다. 차에 갇힌 시간만큼 속죄의 진정성은 입증된다.


도착한 자식들이 부모와 대화의 절반을 얼마나 길이 막혔는지에 소비하고, 


나머지 절반을 언제 가야 안 막히는 지에 쓰는 건 그 번제의 의례다.


명절은 그렇게 죄의식만으로 작동한 지 오래다. 즐거울 리 없다.


 명절이 다시 즐거워지는 길은 미풍양속 따위완 상관없다. 부모는 신분이 아니라 실체다. 가족극의 배역이 아니라 구체적인 여자와 남자다. 그들은 숭고한 효의 대상이 아니라 애틋한 관심의 대상이다.


독립하자. 어른이 되자.


그래서 빚 없는 가족을 만들자.


명절이 즐거워지는 건 그 덤이다. 
 




내년엔 형광바지를 사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