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이야기

복싱계의 명승부

다린이아빠 2015. 5. 3. 10:26

파퀴아오와 메이웨더의 경기를 앞두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참 좋은 경기가 많았던 것 같습니다.

제가 고등학교 때의 fabulous four 라고 듀란 헤글러 레너드 헌즈 등의 물고 물리던 경기도 있었고

하지만 원조 세기의 대결은 바로 다음 제가 말하는 경기가 아닐까 싶습니다.



참고로 한국은 이 경기를 중계해 주는 지 모르겠는 데 여기 천조국에서는 100달러를 내야지 티비를 볼 수 있다고 합니다다.


광고를 많이 봐 줄 자신은 있는 데 돈이 없어서.. 그래서 우리 연구실에서는 그 날 볼 사람들을 모을 예정이라고. 1 인당 20달러씩 모으면 5명만 모여도 되니..


암튼 시작.


1. 무하마드 알리 Vs. 조 프레이져  ( 1971년 3월 8일, 뉴욕 메디슨 스퀘어 가든 )


무하마드 알리와 조 프레이져의 대결은 꿈의 대결이었다.

한번도 지지 않았던 두 복서의 대결에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나타내었고  미국 아니 전 세계는 들끊기 시작했다.

사실 지금의 파퀴아노와 메이웨더의 대결 보다 아마 10배는 더 뜨거웠을것이다 ( 라고 생각한다 ).

 

 사람들은 그 경기를 ‘the Fight of the Century’ 라고 불렀고  위의 제목대로라면 이 경기가 진짜 세기의 대결이 되는 셈이다.

 

조 프레이져는 당시 26승 무패 23KO 였고 알리는 31승 무패 26KO 서로 흠집하나 없는 깨끗한 전적이었다.

 

프레이져에게 알리는 세계 타이틀 2차 방어전이었고 알리는 베트남전 징집 거부로 3년 넘게 링을 떠난 후 복귀전 2차례를 치른 후 거의 4년만의 세계 타이틀 전이었다.

 

알리는 경기 전 그가 평소 하던 대로 역시 프레이져를 놀려대며 자극하기 시작한다.

 

알리는 프레이져를 챔피언이 되기에는 바보 같은 넘’ ’챔피언이 되기에는 못생긴 넘 – 솔직히 좀 못 생기기는 했다 ㅋ -’ 

심지어 알리는 프레이져를 지지하는 사람은 백인’ 이라고 비난했고 프레이져를 'Uncle Tom ( 백인에 순종적인 흑인을 일컫는 말)'이라고 말하며 그를 백인의 졸개 정도로 희화 시키며 놀려댔다.

자신은 사회적 약자를 대변하는 사람으로 프레이져는 마름 정도로 표현했다.

알리는 그 경기를 문화적 그리고 정치적 국민투표’ 로 규정지었다.

물론 자신은 '시민 권리의 챔피언' 그리고 프레이져는 '백인의 희망' 으로 표현하였다.

 

사실 알리는 자신의 신념에 따라 징병을 거부하고 그 결과 그의 황금 시절을 잃어버린 것을 강조하고 싶었을 런지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자신이 복싱계에 없을 때 챔피언이 되면서 잘 나가고 있는 프레이져에 대한 시기심이 생겼고 

또 경기를 선과 악’ 의 구조로 단순화 하여 사람들에게 호소하려는 그런 의도로 말을 했었던 것 같다.

(암튼 사람들은 이 세상이 그렇게 단순하지 않음을 알면서도 이런 단순한 구조를 좋아하고 쉽게 넘어간다.)

 

하지만 이것은 좀 아닌 것이 프레이져야 말로 진짜 가난한 슬럼가 출신이다.

슬럼가에서 소년들을 위해서 봉사하였으며 그가 특별히 백인들의 정책을 옹호하거나 지지한 증거는 없다.

(반면 알리는 중산층의 가정에서 태어나 실제의 가난이 뭔지 잘 몰랐다고 )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사실 알리와 프레이져는 원래 친한 친구였다

알리가 3년동안 베트남전 징집을 거부로 복싱을 못하게 되었을 때 프레이져는 그에게 돈을 빌려주었으며 의회에 증언을 하였으며

당시 닉슨 대통령에게  알리가 복싱을 다시 할 수 있게 청원서도 제출했었다

프레이져는 알리가 군대를 가지 않을 권리도 지지하였는데 만일 침례교에서 싸우지 말라고 하면 – 프레이져는 침례 교도 인듯-  나 역시 싸우지 않을 것이다 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이런 알리의 태도는 프레이져는 알리가 잔인하다고 생각했으며 몹시 섭섭해 했다.

나중에 알리가 파킨슨 병에 걸렸을 대 그는 그것은 자신의 무시한 '알리의 천벌' 이라고 주장한다.


ali_frazer_1.jpeg

--> Fight of Century, 그러나 실제 이 때 알리는 위의 사진과는 달리 몸이 많이 불어서 예전의 날렵함이 거의 없어졌었다.  바로 직전의 Oscar Bonavena 와의 경기에서

15 회에 KO 로 이기기는 했으나 겨우 이겼다. 한 편 프레이져도 고혈압이 있어서 치료 받고 있었다고..



하지만 대중적으로 더 인기가 있었고 또 입담이 좋아 언론에 더 자주 노출 되었던 알리의 이런 행동으로 실제로 많은 흑인들이 프레이져를 싫어하게 만든다.

실제로 언론에서는 ‘ 조 프레이져는 까만색 피부를 가진 백인의 챔피언인가?’ 하는 기사가 나오기도 하고 프레이져의 아이들은 학교에서 왕따를 당했으며 그의 가족은 죽음의 위협을 받고 경찰의 보호를 요청할 지경에 이르렀다.


 

알리의 프레이져에 대한 이런 희화화는 프레이져가 죽을 때 까지 계속 된다.

많은 가쉽 거리를 만들며 결국 이 세기의 대결은 1971 3 8일에 열렸는  전 세계는 이 경기에 주목하게 된다

이 경기는 35개의 외국으로 생중계 되었고 760개의 방송국이 참여할 정도로 당시로서는 최고였고 당시 양 선수의 개런티도 250만 불 정도로 최고 기록을 갱신하였다고 

전 세계가 흥분하였고 아마 지난 세기에 가장 기다린 경기였을 것이라고 하고 실제  세계 온도가 1도 쯤 올라간 느낌이었다고..


경기는 그들의 입담 처럼 치열하였으며 프레이져의 저돌적인 공격에 알리는 당황하였다

11회에 확실한 우위를 점한 프레이져는 15회 전광석화 같은 레프트 훅을 알리의 턱에 작렬 시켜 심판 전원 일치 판정승을 거둔다.

알리로서는 프로 첫번째 패배였다.


https://www.youtube.com/watch?v=jQhFhdmW6Vs

 


경기 전 알리는  네가 이기면 네가 링바닥을 기어가서 너의 발에 입을 맞추고 네가 가장 위대해 라고 말할께

라는 말을 했다고..

자신감의 발로라고는 하지만 세상일이 참 어떻게 될 지 모르는 데.. 이런 태도는 사실 나에게는 그저 경이스럽다.

프레이져는  실제로 경기 후 알리에게 전화를 걸어 약속을 지킬 것을 요구했다고.. 

알리는 백인들의 농간이라며  씹었고 그러면서 비록 내가 다운은 당했지만 나의 판정의 백인 심판들의 농간이다 라고 주장했다그는 패배를 인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경기가 끝난 후  알리와 프레이져 모두 경기 후 병원 신세를 지게 된다

알리는 턱뼈가 부러지게 되고 프레이져 또한 그 경기 덕분에 기존에 가지고 있던 고혈압과 신장염이 악화되어 1달 동안 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나중에 2차전을 앞두고  ABC 방송국에서 둘이 인터뷰를 하게 되는 데  알리가 방송 중에도 계속 프레이져를 무시하자 흥분한 프레이져는 의자에서 일어나서 알리에게 다가갔고 결국 둘이서 링이 아닌 방송국 스트디오에서 권투가 아닌 레슬링을 하게 된다 방송 관계자들은 말리고 애들도 보는 프로에서 어른들이 참 잘하는 짓이다 )


https://www.youtube.com/watch?v=1RmtOnbt3cM



2. The battle of the Z boys  (자라테 Vs. 자모라 ) ; 1977년 4월 23일 Inglewood, California

 

멕시코 복싱 선수들인  Carlos Zarate 와 Alfonso Zamora 의 대결.

일단 선수 소개를 간략히 해 보면 


Carlos Zarate

zarate.jpg 

1951년 5월 23일 멕시코에서 태어난 자라테는 33승 30KO 3 패라는 훌륭한 아마추어 전전과 멕시코 골든 글러브를 수상하고  1970년 2월에 프로 데뷔 합니다.  첫 경기를 3회 KO로 장식한 사라테는 그 후 23 연속 KO 승을 기록하는 데 3회를 넘긴 선수가 2명 밖에 안 되었을 정도로 강 펀치를 자랑하였습니다.

전설(?)에 따르면 몸을 좀 풀었다 하면 샌드백이 터지고 동급에서는 스파링 파트너도 없어서 상위체급 선수들과 글러브를 섞었어야 했을 정도로 밴텀급에서는 그의 상대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고 합니다... ( 주먹을 한 번 휘두르면 모기들이 주루룩 떨어졌다는 전설도 )


결국 사라테는 프로 전적 40전 만에 1976년 5월 8일 당시 WBC 밴텀급 챔피언이었던 Rodolfo Martinez 를 9회 KO로 돌려세우고 WBC 밴텀급 챔피언이 됩니다.


챔피언이 된 후도 2번의 논타이틀전과 3번의 타이틀을 보두 KO 로 장식한 후 46전 46승 45KO 의 만화같은 전적을 가지고 사모라를 만나게 됩니다.


Alfonso Zamora


zamora333.jpg 


1954년 2월 9일 멕시코에서 태어난 자모라는 작은 키 (168 Cm)에  미소년의 얼굴을 가지고 있었지만 큰 궤적의 강력한 훅을 장착한 밴텀급의 강타자였습니다. 

1972년 뮌헨 올림픽 밴텀급에서 미국 선수에게는 이겼으나 쿠바 선수에게 아깝게 져서 은메달을 따낸 후 1973년 프로로 전향합니다. 

프로로 전향한 후 그는 KO퍼레이드를 펼치면서 승승장구했습니다. 데뷔 후 1975년 3월  WBA 밴텀급 세계타이틀전을 치를 때까지  20경기에서 상대를 모조리  KO로 눕혔습니다.

1975년 3월 14일 그 운명의 날. 하지만 그 날도 그의 KO 행진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열린 이 경기의 상대는 안타깝게도 우리에게 너무나 잘 알려진 '홍수환' 선수였습니다.

홍수환 선수는 나중에 인천에서 다시 자모라에게 세계타이틀을 도전하지만 다시 KO 당합니다.  사실 이 때 사모라가 12회 KO 로 이기기는 하지만 사모라도 부상을 당합니다.

자모라에게는 가장 늦게 까지 간 라운드였으며 아마도 그 때 까지 그에게 가장 힘든 경기가 아니였을까 생각해 봅니다



--> 홍수환 선수와의 대결, 홍수환 선수가 챔피언 시절인 듯


홍수환으로부터 챔피언 벨트를 빼앗고 난 후로도 자모라의 승승장구는 멈출 기세를 보이지 않았습니다. 5번의 방어전과 3차례의 논타이틀전을 모두 KO로 장식한 후 29전 29승 29KO라는

전적으로 같은 나라의 같은 체급의 전설 사라테를 만나게 됩니다.


1977년 4월 23일 Inglewood, California에서 두 전설은 드디어 주먹을 교환하게 되는 데


각각 WBC 와 WBA 밴텀급 참피언이 었던 그들은 의외로 이 경기는 논타이틀 전이었습니다.

아마 서로 모든 것을 걸리에는 부담스러울 수도 있었을 것 같고, 아무튼 그 때 까지의 그들의 전적이 모든 것을 말해 줄 수 있을 거 같습니다.

알폰소 자모라 (29전 29승 29KO) vs. 카를로스 사라테 (46전 46승 45KO)

하지만 승부에서 승자는 오직 한명 일 뿐,


두 KO 펀치의 대결은 명불허전 단 한차례의 클린치도 하지 않고 서로 쉬지 않고 주먹을 교환하던 그들은 맷집이 더 좋았던  카를로스 사라테의 4회 KO 승으로 끝나게 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DEMGicT8UJ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