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이야기

정몽주 뎐 ( 시대의 개혁가들 참조 )

다린이아빠 2014. 7. 4. 14:30

최근 국무총리 인선에 있어 참 시끄러웠습니다.

 

정말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인선이었는 데 암튼 2번 연속 청문회도 못해보고 탈락하였습니다.

 

깜냥도 안 되는 사람을 인선했다는 이야기도 있고 그래도 청문회는 했어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지만 아무튼 국민들의 정서와는 꽤 거리가 있었던 인물이었슴은 맞는 것 같습니다.

 

주위에 그런 사람을 일부러 찾으려고 해도 없는 데 어떻게 그런 분들만 나오는 지 참 궁금합니다.

 

참 이상하게도 장관이나 총리들 보면 우리 주변에서 사는 소시민들과는 엄청난 괴리가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이번에 큰 맘 먹고 우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총리 ( 조선시대에는 영의정 )를 찾아 보았습니다.

 

훌륭한 정승 중에 다 아시다시피 세종 때 맹사성이나 황희 같은 사람도 있었지만 제 눈에 확 들어온 이사람 그렇습니다 바로 정몽주 입니다. ( 정몽준 오타 주의 )

 

 

밑의 글은 임용한 선생님의 시대의 개혁가 들에서 많이 참조하였습니다.

 

 

정몽주의 고향은 경북 영일이다.

 

지금도 매우 시골이지만 그 당시에도 더 그랬다. 고려시대 인물 중 출생지를 명확히 아는 경우가 많은데 정몽주는 공덕비가 발굴되어 정확히 알 수가 있다. 뒤에서도 나오지만 정몽주의 공덕비는 꽤 많고 이것은 그가 얼마나 당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는 지를 설명해 준다.

 

얼마 전 선거에서 고승덕의 학교 때 성적 가지고 말이 많았는 데 하나 분명한 사실은 그가 공부를 엄청나게 잘 했다는 것이다. 아 물론 성적이 좋다고 좋은 관료나 정치가가 되는 충분 조건은 되지 못하지만 적어도 성적을 중요시하는 우리나라에서 성적이 좋은 것은 정치가가 되기에는 매우 유리한 조건임이 틀림이 없다.

 

하지만 성적이 가장 좋은 장원 급제자 중 의외로 정승이 적은 데 실제 조선 시대에 장원 급제를 하고 영의정에 오른 사람은 최항’ ( 최충헌 손자 말고 조선 시대 인물임 )과 노태우 대통령의 할아버지인 노사신그리고 대동법을 실행 시킨 김육 정도 이다. 그리고 고려 시대까지 범위를 넓히면 정몽주도 여기에 포함된다.

 

아무튼 경북 시골에서 태어난 정몽주는 1355년 부친상을 당한 정몽주는 삼년상 당시는 불교 국가여서 유교식 3년상을 치르는 사람이 드물었다고 함 - 을 치르고 1359년 소과에 응시했다.

 

 소과는 생원 진사를 뽑는 시험이다. 소과에는 초장, 중장, 종장이라고 부르는 3번의 시험이 있는 데 장마다 시험과목이 다르다. 그는 이 세 번의 시험에서 연속으로 장원을 했다. ‘전과목 수석합격이다. 사실 요즘도 고시 3관왕은 간간히 있지만 이렇게 모두 1등을 한 사람은 드물다. (위에서 말한 고승덕도 연수원 성적은 12등 이었다고 참고로 같이 졸업한 문재인은 2)

 

이런 결과는 요즘으로 치면 신문에 대서특필될만한 대형사건이었다. 이 삼장 모두 장원은 고려시대보다 문벌귀족의 특권이 대거 축소된 조선시대에 조차 드문 기록이다. 더욱더 놀라운 사실은 정몽주의 집안과 출신으로 보면 한번의 장원도 힘든 상황이었다는 것이다. 장원을 하려면 대단한 집안 배경이 필요로 했고 조선시대에도 장원은 서울의 명문대가 집 자제에게 준다는 암묵적인 관행이 있었다고 한다. 대 문호 송시열도 이 관행에 걸려 장원을 못 할 뻔 했는 데 마침 시험관이 송시열을 알던 최명길 ( 김한길과 관계없는 사람임 ) 이어서 장원으로 뽑혔다는 일화가 전해질 정도다.

 

자꾸 엇나가는 데 그럼 조선 시대의 최고 천재는 누구일까?

 

아마 율곡 이이 일 것이다.

 

율곡 이이도 응시한 과거 시험 9번 모두 장원을 하여 구도장원공 (九度壯元公) 이란 별명을 얻었다누구 문하에서 배운 것도 아니고 어머니에게 배우고 혼자 독학을 했다고 한다. 한편 퇴계 이황 선생은 과거에 떨어지기까지 하였다.( 시험 잘 보는 게 천재라고 가정 할 때 내린 결론임. 오해 마시기를 )

 

참고로 조선 시대의 경우 장원을 하면 무조건 문관 6품관으로 등용된다.

 

그 이외에는 관료가 되려면 이조의 인사 담당관이 그를 뽑아주어야 한다. 그것이 장원 논쟁을 일으키는 진짜 이유가 된다.

 

아무튼 정몽주는 이 대단한 차별의 벽을 그곳도 세 번 모두 장원이라는 전무후무한 기록으로 뚫었다. 2등과의 압도적인 성적의 차이가 아니라면 그것이 가능했을 리가 없다. 아주 당연하게도 이 천재는 소과 다음 시험인 대과에서도 당당히 장원으로 합격을 한다.

 

그 후 그는 성균관 교수로 채용되었고 쟁쟁한 수재답게 사서 [논어] [맹자] [대학] [중용]에 대한 주자의 주석서인 <주자집주>를 제대로 해석하고 가르친 최초의 인물로 알려져 있다. 이때는 주자학 수입 초창기여서 주자의 사상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는 데 천재 정몽주는 독학으로 그것을 풀어냈다. 훗날 조선시대에 가서 중국에서 들어온 다른 유교의 경전과 정몽주의 강의 내용을 비교할 때 틀린 곳이 없어 사람들이 매우 놀랐다고 한다.

 

정몽주의 문인 이색은 번번히 그를 칭찬하여 말하기를 정몽주가 이치를 논평한 것은 물론이고 이러저러하게 함부로 하는 말도 그 어떤 것이니 모두 사리에 합당하지 않은 것이 없다라고 했다.( 정말 최고의 칭찬임 )

 

학자로서 정몽주는 정상의 자리에 올랐다. 그는 나라의 하나 뿐인 국립대학인 성균관의 가장 유명한 교수이자 총장이다. 과거 급제자의 대부분은 성균관 출신이고 앞으로의 대부분의 과거 급제자와 관료가 그의 제자가 되고 그는 가만히 있어도 부와 명예는 보장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현실의 벽은 높았고 위험했다. 학자적 존경에 만족하지 않고 세상을 바꾸려면 위험한 세계로 뛰어들어야했다.

 

정몽주는 1372(공민왕 213 명나라 서촉지방을 평정한 것을 축하하기 위해 명나라에 파견되는 정사(正使)인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홍사범(洪師範) 서장관으로 당시 명나라의 수도 남경에 다녀왔다. 당시 중국은 원과 명이 갈라져 있어 명나라의 수도는 남경이었다.

 

 남경에서 고려로 귀국하는 길에 바다에서 태풍을 만나 배가 난파당했다. 정사인 홍사범 등은 익사하고 정몽주는 바위 섬에서 구사일생으로 표류 13일 만에 살아났다. 배 조각을 붙들고 바다 위를 헤엄쳐야 했을 정도로 심각한 난파였는데 실제 생존자도 겨우 20% 정도 였다고 한다. 그 후 지나가던 중국 배에 겨우 구조 되었다.  그는 가슴 속에  태조 주원장의 서신을 간직하며 물에 한번 젖지 않게끔 보존하고 있었다 태조가 이 소식을 듣고 배를 보내어 굶주림 속에서도 의연한 그의 모습을 보고 귀국을 도와주었으며, 이 사실이 알려져 명나라로부터 깊은 신뢰를 얻게 되었다.

 

당시 고려시대는 왜구로 전 국토가 피폐해져 있었다.

 

전쟁은 싸움 잘하는 무관만 하는 줄 알지만 사실 전쟁 대부분은 결전의 시 훈련, 행군, 진지구축, 보급 관리 행정 정보 연락을 하고 그러는 데 시간을 보낸다. 한자는 너무 어려워서 무관 중 읽지 못하는 사람이 태반이었고 당연히 이런 일은 문관의 책임이었다. 실제로 전투를 하는 시간은 정말 짧다.

 

참고로 우리가 왜구라고 하면 그냥 바다 해적으로 아는 데 그 피해가 어느 정도였냐 하면 고려시대 백성 중 해안가에 사는 사람들은 왜구를 피해 바다에서 50리 이상 떨어진 곳에서만 살았다고 한다.

 

물론 고려뿐 아니라 조선 명나라 등도 왜구 때문에 엄청 고생을 했는데 그래서 16세기 중엽에 명나라에서는 왜구 토벌에 혁혁한 공을 세운 척계광 장군이 국민적 영웅이 될 정도였다고 한다.

 

웃긴 것은 지금도 무협지 하면 중국인데 그 때 무협지에 나오는 난다 긴다 하는 곽정 같은 고수들이 왜구와의 다이다이 싸움에서 다 개박살 났다고 한다. 비법이 잘 알려지지 않은 좋은 칼을 쓰고 무술이 뛰어났던 왜구들, 사무라이들은 1:1 대결에 몹시 능했다고 한다.

 

이 때 고려에서는 왜구 토벌에 활약을 한 사람이 최영과 이성계 등인데 정몽주는 이성계의 여진과 왜구 토벌 전투에 참가하였다. 이들 둘다 승리를 이끌어 척계광 처럼 국민적으로 지지를 받게 된다.

 

아무튼 이성계의 왜구 토벌로 나라의 영웅이 되는 데는 정몽주도 큰 역할을 하였다. 당연하게도 둘은 절친이 되었으며 실제로 이방원이 정몽주를 죽였을 때 내가 사약을 먹고 싶은 심정이다라고 말하며 이방원을 꾸짖는다. ( 물론 정몽주도 이성계가 자기를 죽이지 않으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이성계 집에 갔다가 당한 것이다. 정몽주는 이미 힘의 균형이 이성계를 떠나 이방원에게 넘어가 있는 것을 몰랐던 것이다 )

 

특히 우왕 대는 왜구의 침공이 절정에 달했던 시기였다. 소탕작전에 한계를 느낀 고려는 왜구의 본산인 규수에 사신을 보내 왜구의 단속을 요청했다. 하지만 당시 왜구는 단순한 해적이 아니라 지방 정권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었다. 규수의 영주는 고려 사신을 죽이지는 않았지만 투옥해서 거의 죽을 지경으로 굶기다가 돌려보냈다.

 

1377년 정몽주를 제거하고 싶었던 친원파는 기회다 싶어 언양 유배에서 돌아온 정몽주를 사신으로 선발했다. 친원파가 비교적 친했던 이색도 정몽주 제거 음모를 막지 못했다. 이색은 걱정이 되었는 지 장문의 시를 지어 사신으로 떠나는 정몽주를 환송했다. 속으로는 다시 못 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 지도 모른다.

 

규수에서 정몽주가 어떻게 했는 지 그리고 그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 지 기록이 남아 있지 않지만 규수의 영주는 정몽주에 매료되었다. 그는 왜구를 단속하겠다는 약속과 함께 왜구에서 잡혀온 포로 수백 명을 돌려 보내는 호의를 베풀었다.

 

 이 한번의 사행으로 왜구가 근절되지는 않았지만 상당한 효과를 보았던 것 같다. 고려가 망한 후 조선에서는 경기도 연천에 숭의전을 지었는 데 여기에 고려의 대표적인 신하 16명 중 정몽주의 위패가 있는 데 그 이유는 선죽교에서의 충의 때문이 아니라 왜구 문제의 해결 때문이었다.

 

정몽주가 성균관의 대사성으로 있을 무렵인 14세기 말에는 대명 관계가 좋지 않았다.

 

혹시 김용의 의천도룡기를 읽으신 분은 다 아시겠지만 명나라를 건국한 주원장은 혹독하고 각박하고 지독했다. 최하층 빈민에서 양자강 수적 ( 그러니까 강의 도적 )을 거쳐 황제까지 된 인생 여정을 보면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지만 그의 가혹함은 상상을 초월했다. 자신에게 조금만 불리하거나 위험한 징조가 보이면 가차없이 상대를 제거했다. 주원장의 통치관은 내가 손해를 보는 것 보다는 ( 억울하든 말든 ) 상대가 고생하는 것이 낫다라는 것이다.

 

그의 폭력성은 진시황보다 더 심하면 심했지 덜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 당시 그의 눈에 고려는 아직 믿을 수 없는 변방의 국가였다. 더군다나 약 100년가 고려는 원나라의 부마국이었다.

 

그나마 사랑했던 노국 공주가 원나라 사람이기는 하지만 반원 정책을 폈던 공민왕이 살해가 되고 우왕이 즉위했다. 이 뒤숭숭한 기간에 친원파였던 재상 김의가 고려에 와 았던 명나라 사신을 살해하고 원나라로 도망갔다. 명과 외교 관계가 개통 된 지 겨우 6년만 이었다. ( 큰 소리 치는 넘이 도망은 왜 가나? )

 

우리의 깡패 황제 주원장은 격노했다. 게다가 우왕을 옹립하는 데 큰 역할을 한 이인임 (박영규?) 도 친원파였다.

 

그 와중에 반원파이고 명나라와 수교를 주장하였던 정몽주는 귀향을 가게 된다. ( 이 귀향에서 돌아오자 마자 규슈로 사신으로 가게 되는 것이다 )

 

아무튼 이 사건을 계기로 고려와 명과의 관계는 악화 되었고 명은 원나라보다 더 심하게 조공을 요구했고 그것을 그 해 다 내지 못하면 다음 해 조공에 합산했다. ( 한 명의 욱하는 신하 때문에 진짜 나라 전체가 고생한다 )

 

우왕 5년부터 10년까지 고려는 18회에 거쳐 명나라에 사신을 보냈으나 입국이 금지된 경우가 여덟 번 입국한 열 번 중 네 번은 사신이 구금되거나 유배되었다.

 

그렇다고 약소국 고려가 명나라가 거부한다고 사신을 보내지 않을 수도 없었다.

 

철마다 사신을 보내야 했고 특히 신년 하례 사절과 황제 축하 사절은 중요한 사행이었다.

 

1384년 명나라로 간 사신들이 중국 땅에 유배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관리들이 명나라 사행을 회피하게 되었다.

 

명태조의 생일 축하 사신으로 내정되었던 밀직부사 진평중은 이인임 파였던 임견미에게 뇌물을 바치고 사신을 사퇴했다. 그 바람에 명나라로의 출발 시기를 놓쳤다.

 

남경까지는 보통 90일이 걸리는 데, 이미 명태조의 생일이 50여 일 밖에 남지 않은 상황. 사신의 지각 도착은 큰 실례로 천하의 명태조 주원장이 이 실수를 그냥 지나갈 리 없었다. 진평중의 사퇴로 명나라 사신행이 죽음의 사행이 되었다.

 

그러자 이 사태의 원인 제공자인 임견미가 진평중 대신 정몽주를 천거했다.

 

뇌물도 이미 받았고 눈엣가시 같은 정몽주를 제거할 수 있으니 일거 양득이었다.

 

우왕도 미안했는 지 정몽주에게 사신행을 강요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나 정몽주는 기꺼이 사행을 맡고, 즉시 출발했다. 그간의 참전 경험이 도움이 되었던 지 암튼 정몽주는 대단한 통솔력과 추진력을 발휘해서 사신단을 독촉하고 최단거리로 일정을 짜고 육지로 상륙해서는 정신없이 말을 달려 아슬아슬하게 남경에 도착하였다.

 

남경에 도착한 정몽주는 즉시 명태조를 접견하고 생일 축하 문서를 바쳤다. 여기서 엄청난 사건이 벌어지는 데 중국황제의 생일에 도착하는 나라와 부족은 수십 개가 넘는다. 이들은 모두 선물과 생일을 축하하는 글을 바친다. 보통의 황제라면 이런 상투적인 문서는 읽지도 않고 또 주원장은 그 어려운 글을 읽을 실력도 없었다. 하지만 이 잔혹한 황제는 매사에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었다. 냉혹했지만 천부적인 통솔력과 리더십이 분명했던 그는 문서의 내용이 아니라 작성한 날짜를 보았다. 그리고 그 문서를 작성한 시기가 겨우 50일 전이며 보통 고려에서 남경까지 오는 시간으로 50일은 턱없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밑바닥부터 살아온 그는 세상사에 해박하고 의심이 많은 만큼 음모에 예민했다. 그는 정몽주의 파견에 고려 조정의 음모가 있다는 사실을 대뜸 알아차렸다.

 

 고려 사람들이 자신의 손에 죽기를 바라는 이 자는 누굴까? 그런데 이 자는 그 음모를 멋지게 극복했다. 가만 이 자는 10여 년 전 배에서 난파 당했던 그 사람이 아닌가? 놀랍게도 주원장은 정몽주를 기억해냈다. 보통 사람은 바다를 떠다니다가 표류하는 끔찍한 경험을 하면 다시 배를 타기는커녕 목욕탕에도 못 들어간다. 실제 세월호 사건의 학생들이 그렇다고 한다. 목욕탕에 못 들어간다고. 정신과적으로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 (post traumatic stress disorder) 인데 주원장은 21세기에 만들어진 이 병명은 몰랐지만 과거 양자강을 무대로 활약한 수적 출신인 그는 이를 알아차렸다.

 

정몽주의 배포와 능력에 매료된 황제는 정몽주를 후하게 대접하고 이전에 구금되었던 고려 사신들도 석방해서 돌려보냈다.

 

1387년 다시 사신이 된 정몽주는 이 욕심 많고 심술궂은 황제로부터 그 동안 누적된 조공액 탕감은 물론 1년치 조공액도 감액받는 호의를 얻어내고 귀국했다. 진짜 대단하다고 밖에 말 할 수 없다.

 

학자로서 관료로서 정몽주는 탁월한 능력과 도전 정신을 보였다. 그가 중국과 일본을 오가며 보여준 능력과 노력은 전례가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진짜 감동은 지금 부터이다. ( 놀라지 마시라! )

 

규수에 사신으로 갔을 때 정몽주는 그곳에 잡혀온 많은 고려 양민이 왜구의 노획물이 되어 사는 것을 보았다. 일부는 데려왔지만 아직 수 많은 동포들이 왜국에 잡혀있었다. 그는 조정 대신들에게 호소해서 그들을 되찾아오기 위한 모금운동을 전개했다. 이들의 비극은 곧 우리 책임이니 사재를 털어 그들을 구원해야 된다는 것이었다.

 

이 행동이 당연한 것으로 여겨진다면 한국의 역사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읽어 보시기를 권한다. 우리 역사에서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가장 분통터지고 지배층의 행동에 분노가 솟구치는 장면이 바로 이 부분이다. 우리는 수많은 외침을 받았고 그 때마다 많은 백성이 외국으로 잡혀갔지만, 지배층은 자신들의 일가친척이 끌려갔을 때를 제외하고는 납치된 백성이나 전쟁포로를 되찾는 데 관심이 없었다. 납치된 사람들은 으레 돈을 받고 팔리기 때문에 그 들을 찾아오려면 돈이 필요했다.

 

청나라에 끌려간 조선인의 경우 오히려 조선 정부에서 데려가라고 요구하면서 당시 청나라에 있던 소현세자에게 조선인을 맡긴 것을 보면 실제 요구하는 돈의 액수도 크지 않았을 것 같다. 그러나 정부는 돈이 없다는 이유로 전쟁 포로가 죽지 않고 포로가 된 것 자체가 사형에 해당하는 중죄라는 구실을 들며 그들을 외면했다. 심지어 포로가 되었던 병사가 탈출해서 돌아오면 적에게 항복했다는 죄목으로 죽이는 것이 관례였다.

 

사실 여자들도 마찬가지여서 화냥년의 어원이 환향녀 라는 말이 인구에 회자 될 정도다.

 

빼앗아간 넘들에게 반항은 고사하고 말도 제대로 못하는 무능한이지만, 그래도 뺏긴 것은 분하니 진정한 피해자인 여인네들에게 분풀이 하는 것이다.

 

아무튼 우리나라 지배층은 전쟁이 나면 제일 먼저 도망가면서 자기 아랫사람 왕따 시키고 뜯어 먹는 데는 정말 선수다.

 

수백 년간 사대부들은 민심이 천심이며, 백성을 자식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미사여구를 수도 없이 남겼지만, 정작 정몽주와 같은 행동을 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정몽주의 행동은 규슈의 지배층에도 깊은 감명을 주어 나중에 정몽주가 살해되자 그들이 더 슬퍼했으며 그들 중 개인적으로 사당을 차리고 승려를 불러 재를 올려주는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정몽주의 삶을 보면 그는 고난과 역경을 두려워하지 않고 주어진 조건에서 최선을 다하는 관료였다. 정몽주는 그간의 삶에서 보여준 노력과 헌신 도전정신을 국가의 법과 사회제도 개혁에도 쏟았다. 일본에 사신으로 가서 포로들의 형편을 보고 포로송환운동을 제기한 것 처럼 그는 어떤 관직에서든지 그 속에서 발견한 낡은 법과 폐단을 개혁하고 새로운 법과 제도를 도입하고자 했다. 그 노력은 만년에 새로운 법전인 <신정률>이라고 하는 법전 하나를 만들었다. ( 참 부지런도 하시다. 법전하나를 뚝딱 만드시다니 그러나 아쉽게도 이 법전은 전해지지 않는다 )

 

물론 그는 우왕을 폐할 때는 저항하지 않았고 공양왕을 옹립하였으며 조선의 영의정 격인 수문하시중이 되는 등 왕과 권력층이 자행하는 불법에 적극적으로 저항하지 않고 순응했다는 후대의 비판을 받았다. 하지만 세상을 바꾸는 데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 완전한 인간이 있을 수 없듯이 완전한 방법도 없고 어떤 정치인이 항상 일관적일 수만은 없다. 아래 사람이 100명만 되어도 보스가 일관성을 유지하기가 얼마나 어려운 지 알 것이다. 아주 당연하게도 모든 사람의 기대와 기준을 충족시킬 수 있는 정치인이나 보스는 없다.

 

 

정치인이나 관료에게 개인적 욕심과 대의 명분은 참으로 헷갈리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김대중의 예를 들면 그가 대통령 병 환자인 것은 맞는 말이지만  그는 자신의 욕망을 대의 명분과 잘 조화시키고 헌신하여 나름 정치를 잘 하였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우리가 역사에서 교훈을 얻고자 한다면 각자의 노선을 걸었던 사람들이 과거와 자기만족과 자신의 욕심 그리고 야망에 매몰되었는 지 그리고 그가 선택한 방법에서 어느 정도의 헌신과 완성도를 지녔는 지를 함께 물어야 할 것이다. 그러한 점에서 정몽주의 삶은 인간으로나 관료로나 개혁가로나 우리에게 많은 생각과 감동을 전달해 준다.

 

이런 정치인이 참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