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에도 우리 아파트 옆 단지에서 한 중학생이 아파트에서 떨어져 자살을 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자살률 1위 나라에서 중학생만 스트레스가 없을 리 없지만 유명인을 비롯한 이런 소식을 접할 때 마다 가슴이 착찹하다.
내가 학교 다닐 때도 참 성적 때문에 걱정이 많았다. 소심한 성격이어서 그런 지 성적이 조금만 떨어져도 참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던 것 같은 데 지금 애들 공부 하고 학원 다니는 것을 보면 그 때는 오히려 양반이 아니었나 싶다.
최근 대학교 발표 시즌이기도 하고 또 우리 딸들 학원 다니고 공부하는 것 보고 옛날 내 기억이참 생각이 많이 나기도 한다.
나도 대학 시험 때문에 여러 번 시험 보고 떨어지고 뭐 결국 원하는 대학이 아닌 다른 대학에 들어 가긴 했지만 그 간 참 우여 곡절과 사연이 많았다.
지금 밤 11시가 넘었는 데 우리 산모가 계속 소리만 지르고 애기 날 생각을 안 하여 시간이 좀 나서 옛날 나 대학 시험 볼 때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 참 원래 내 블로그에 우리 딸 이야기를 제외하고는 내 이야기를 잘 안하는 데 워낙 심심해서 )
아무튼
나는 나름대로 전두환 정권 덕을 본 사람이다.
지방에 살았던 나는 전두환 정권이 출범하면서 나름대로 서민들의 아픈데를 긁어 준다고 내세운 정책이 ‘과외 금지 정책’ 이었는 데 그 덕분에 반대 급부로 잘 사는 서울 애들이 과외를 못 받아서 내 개인적으로는 나름 좋은 성적을 받을 수 있었던 것 같다. 실제로 평준화였던 우리 고등학교에서 우리 졸업 기수 애들 중 서울대에 23명이나 갔고 또 우리 반에서만 의대에 7명이나 갔다.
대학에 들어와서 서울 애들에게 물어보니 꽤 많은 숫자라고 하는 데 그 때 우리 학교의 학생 수는 서울 명문 고등학교의 반도 안 되었다.
거기다가 서울에 있는 대학에 들어오면서 대학생이 되었을 때 대학생 과외가 풀려버려 대학에 들어와서는 나름 돈을 많이 벌어 떵떵거리면서(?) 살 수 있었다.
그 때 1 주일에 2번 2 시간 해주면 1달에 30만원을 받았는 데 그 때 등록금이 120만원 정도, 과외만 열심히 하면 대학교 등록금은 해결 될 수 있었다. 실제 2 탕만 뛰면 그 때 인기 있었던 소니 워커맨, 아이오와, 산요 그런 카셋트를 살 수 있었다. ( 그 때 그렇게 잘 나가던 일본 회사는 지금은 거의 다 망한 듯 )
아무튼
지금의 대학 입시 제도는 수시 정시 특채 기타 등등 마치 미국 월가의 파생 금융 상품 처럼 수험생 당사자는 물론 만들어낸 사람도 헷갈리는 제도였지만 우리 때는 1등부터 꼴등 까지 점수를 매겨 한점이라도 높은 사람이 합격을 할 수 있는 설명이 필요 없는 간명한 학력 고사였다.
총 9과목 이었고 총점은 320점에 체력장 20점 더해서 340점 만점이었다. 거기다가 10등급 으로 마련된 내신이 있었는데 시험 문제가 어려워서 내신 1 등급 차이는 수학 주관식 문제 한 개 밖에 안되었다. ( 같은 하숙집의 친구는 3 등급인데 서울대 법대에 합격하였다 ) 더군다나 바로 우리 앞 선배부터 선지원 후시험으로 바뀌어 일단 원서만 대학에 내면 이건 눈치 작전 그런 거 애초부터 불가능하였다.
원서 낼 때도 ‘ 앞으로 남은 기간에 공부 열씨미 해서 성적 올리지 뭐’ 하면서 막 평소 지 성적보다 상향 지원 하는 놈들이 있었는 데 어떤 재수 없는 놈들은 실제로 성적이 마구 올라가 합격하기도 했다.
시험은 지원하는 대학에 들어가서 보았는 데 앞으로 가르치게 될 교수들이 시험 감독을 들어오기 때문에 컨닝은 생각할 수도 없었다. ( 그래도 컨닝하는 넘이 있더라는 )
정말 약간의 운이 작용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헷갈릴 것도 부정 요소도 개입 될 것이 하나도 없었다.
지금 처럼 특차다 수시다 하여 열성 엄마들도 정보를 캐러 돌아다닐 필요도 없었고 학원은 금지 되어 있었기 때문에 우리도 고작해야 독서실 가서 공부하는 것이 돌아다니는 것의 전부였다.
그냥 앉아서 공부만 하면 되었다.
나는 밤 12시 까지 학교에서 공부하다가 왔는 데 그 때 오면 엄마가 라면을 끊여주셨다. 그것 먹고 자고 아침 7시에 일어나서 학교 가는 게 일이었다.
참 낭만적이고 간단 명료한 공부 방식이었다.
그러나 제도 중 한 가지 억울 한 것은 그날 컨디션이 나쁘거나 운이 없으면 그 해 대학엔 떨어진다는 사실이었다.
특히 모든 전기대가 같은 날에 시험을 보기 때문에 서울대 떨어지고 연세대에 가는 그런 행운을 누릴 수가 없었다.
아마 이런 제도가 있었으면 내 성격에 아무 대학이나 갔을 것이다.
나도 생각해 보면 공부하기를 끔찍해 하던 학생이었던 것 같다.
패자 부활전 그런 건 없었다. 평소에 공부를 잘 해도 대학에 못 가고 재수 하는 애들이 생겨났다.
실제로 그 때부터 재수생이라고 다 공부를 못하는 것이 아니었고 재수생 중에도 공부를 매우 잘하는 애들이 많아졌다. 실제 우리 과에 입학 했을 때 삼수생이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현역 보다도 많았다.
( 150명 중 85명 정도가 재수생이었고 40명 정도가 삼수생이었다 )
아무튼 내가 졸업하던 그 해 학력 고사 시험은 어려웠다.
전국 수석을 노렸던 나는 첫 번째 과목 10번 문제 까지 풀어 보고 나서 만점이 꿈이 사라진 것을 깨달았고 두번째 과목인 수학 시험을 보고 나서 3,4 교시 매우 잘 보지 않으면 합격도 어렵겠구나 느꼈다.
점심을 코로 먹었는 지 입으로 먹었는 지 기억이 안 나는 데 3 교시 영어 시험을 앞두고 시험 보러 들어가기 싫어졌다.
실제 2째 시간인 수학 시험을 보고 나서는 시험에 떨어졌다고 생각하고 안 들어 오는 사람도 있었다. (내가 지원한 과에는 많지 않았지만 전자공학과 같이 높은 점수가 요구되는 과에는 실제 시험 포기 수험생이 많았다고 한다 )
그러나 나는 비록 수학 시험을 망쳤지만 여기에 굴하지 않고 끝까지 다 시험을 보았다.
예상 했던 것 보다 못 본 것 같았고 그 암울한 느낌대로 합격자 명단에 내 이름은 없었다.
발표 하는 날 그 대학 운동장에 몸소 갔었는 데 내 수험 번호가 44번이었던 것 같은 데 43번 45번은 있는 데 44번은 없었다.
아무리 뚫어지게 봐도 없었던 44번이 새로 생기지 않았다.
말은 안해서 그렇지 수험 번호 44번이 배정 되었을 때부터 참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잠깐 아주 잠깐 동안 번호가 재수 없어서 떨어졌을 뿐이라고 생각하였다.
암튼 그 때 떨어지고 후기 대학에 다시 시험을 보아 합격을 하였으나 아무리 재수하기 싫어도 그 대학은 좀 아니다 싶었다.
미팅 나가서 말빨이 안 설 것 같았다.
중 고등 학교 때 꿈이었던 좋고 멋진 대학 들어가서 미팅 나가서 이쁜 여학생과 데이트 하는 게 소원이었는 데
아무래도 그 대학은 그러기에 좀 부족한 것 같았다.
지금와서 이런 나를 속물이라고 막 욕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겠지만 그 때 어린 생각으로는 단지 그 이유였다.
( 뭐 지금도 속물인 것 사실이지 뭐 )
어쩔 수 없이 재수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가끔씩은 그 때 생각을 한다.
그 때 그 전기 대학에 합격했으면 어땠을 까?
좋은 대학이었으니까 대기업에 취직 했겠지. 실제 우리 때는 취직은 졸업과 더불어 다 되었다. 그것도 그것도 여러 군데 말이다.
대기업 취직 되었다고 기분 좋다고 소고기 – 뭐 이건 아니고 – 그러나 지금으로 봐서는 그리 좋은 과도 아니고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면서 지금쯤 명퇴 걱정하면서 살아갈 거 같다.
원래 술을 못하는 내가 조직 생활에 잘 적응 했을 것 같지 않고 싫어 하는 사람 앞에서 표정 관리 못해서 승진이 빨랐을 것 같지 않고 여러 군데 돌아다니는 것 좋아하는 데 뭐 연구 하는 것 잘 했을 것 같지 않고
그런데 그 후 정말 거짓말 처럼 내가 의대에 합격하고 나서 의대 점수가 급격히 올라갔다.
의대 정원이 많아 경쟁률이 높아지지 않고 또 1 지망 떨어지면 2 지망 ( 당시 1지망에서 80% 2 지망에서 20%를 뽑았는 데 서울대를 제외하고는 의대 점수가 대개 가장 높으므로 의대를 쓰면 100% 선발하는 게 된다. 반대로 서울대 공대는 대부분 40명을 뽑았는 데 80%만 뽑으므로 32명 뽑는 것이고 나머지 8명은 커트라인이 더 높은 과에서 떨어진 사람들이 선발되게 된다. 거기다가 갑자기 지원자가 몰리면 3대1 4대1 훅 넘게 된다 ) 쓰겠다는 생각으로 별 생각없이 의대를 써서 되었는 데 잘 풀린 것이다.
덕분에 실제로는 그렇게 고등학교 때 공부 잘 하지 못했는 데 주위 사람들에게 과대 평가 받기도 한다.
많이 부담 스럽기는 하지만 그 때 대학 떨어지기를 참 잘했다고 생각이 든다.
그 당시 그 국립 대학 공대 갔던 친구들 요즘도 가끔 만나는 데 사는 게 참 녹록치 않은 거 같다. 다 바쁘고 술 많이 먹고 윗사람 눈치 보고
명퇴 걱정하고
나 이후 학번부터 공대 정원이 2배가 되어 입학생이 많아지면서 희소 가치도 뚝 떨어져 그것도 슬픈 일인 것 같다.
의대도 정원이 늘어나서 망하기는 했고 또 의대 공부 할 때 정말 힘들기도 했지만 뭐 공대생이라고 우리 만큼 공부 안하겠는가? 아무튼 의대가 공대가 망하는 것 보다는 다행히 (?) 덜 천천히 망하는 것 같다.
아무튼
혹시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 내가 많이 살아 본 것은 아니고 경험도 미천하지만 인생은 길고 꼭 지금 잘 되었다고 나중까지 잘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
나는 내 지금 경험으로 가장 잘 느낀다.
이제 분만하러 가야겠다.
뭐 그냥 사는 게 그렇다고
지금 실패했다고 계속 안 좋은 건 아니라는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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